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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민 Apr 28. 2023

4.16

생일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들


매년 4월 16일은

4월 16일은 나의 생일이다. 2014년 4월 16일 내 생일 아침에 일어나 머리맡 핸드폰을 켜보니 16개의 알림이 와 있었다. 내 생일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읽어보려 밀어 잠금 해제를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쭉 읽어보니 제주도로 향하던 배에 사고가 났다는 이야기였다. 배에는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다고 했다. 다행히 연이어 전원 구조에 성공했다는 뉴스 링크를 친구가 보내주었다. 하지만 또 몇 시간이 지나 그건 오보였다는 메시지가 왔다. 그날 이후 매년 돌아오는 나의 생일을 마냥 행복하게 보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내 생일을 축하해 주는 주변 사람들은 있었지만, 매스 미디어와 공공 공간은 엄숙한 분위기를 몇 년간 지속했다.


올해 4월 16일, 시청 앞을 우연히 지나가게 되었다. 생일 식사를 하고 짧은 산책을 위해 시청 앞을 걷게 되었는데, 시청 앞 광장 한 켠에는 10.29 이태원 참사 추모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추모 공간 주변에는 서울시가 부과한 벌금에 반대하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추모 공간 앞은 한참 서성거리다 지나가면서 오늘도 그런 날이었지 생각하게 되었다.


거리의 사람들을 보면 잊어버린 듯하다. 이제 4월 16일은 평범한 하루가 되어버린 듯 하다. 나는 풀리지 않은 씁쓸함을 남겨둔 채, 나의 생일을 행복하게도 살짝 슬프게 보냈다.




브라우니 케이크

중고등학교를 태국에서 나왔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9월에 시작하는 3학기 제도를 따르고 있었다. 그래서 내 생일 4월 16일은 항상 방학이었다. 4월은 태국 달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하고, 서양에서는 부활절을 기념하는 방학 기간이기도 했다. 마침 또 내 생일 앞뒤로는 태국 쏭크란 축제가 열리기도 해 태국에 있으면 내 생일은 무조건 방학이어야 했다.


나는 내 생일이 방학에 있는 것이 싫었다. 나는 생일 파티도 열지 않았으니, 친구들에게 축하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학기 중에 생일이 있어 다 같이 학교에서 축하해 주곤 했는데 말이다. ‘내즈’라는 친구는 학기 중 같이 무리 지어 노는 친구들 생일마다 브라우니 케이크를 구워 가져와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내즈가 구운 브라우니 케이크는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며 진한 초콜릿 향이 일품이고 그 위에 아이싱이 있어 한 입만 먹어도 달콤했다. 10년도 전에 친구들 생일날마다 먹었던 내즈의 브라우니 케이크를 생각하면 아직도 입 안이 달콤해진다. 그 당시 나와 우리 가족은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맛있는 케이크를 사 먹을 수 없었다. 맛있는 케이크는 비싸기도 했지만, 왕복 3시간이 걸리는 도시에서 사 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즈가 구워주는 브라우니 케이크가 특별히 맛있었는지 모르겠다.


내 생일이 있는 4월 방학이 시작되면 학교를 못 간다는 아쉬움에 방학식 날에는 친구들을 붙잡고 작별 인사하기를 싫어했다. 친구들을 못 보는 게 서운하고 아쉽고 안타까워서 그랬다. 사실 그 마음 중 38% 정도는 내즈의 브라우니 케이크도 못 먹고 생일도 축하받지 못해 아쉬운, 그런 앙큼한 마음이 항상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털어놓아 본다. 친구들, 미안.



'99년 4월 16일

이제 막 1999년 4월에 들어설 무렵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새 학기가 시작되고 새로운 반에서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할 그 무렵, 내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전 년 생일은 집에서 학교 친구들을 초대해 생일 파티를 했다. 모두 엄마, 아빠가 준비해 생일 파티를 했기 때문에 그 해 생일도 나는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고착 9살이었으니 생일에 대한 로망이 얼마나 크겠는가.


1999년은 IMF가 터지고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로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힘들게 살아가고 있을 때였다. 9살, 초등학교 2학년인 나는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체감하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


‘99년 4월 16일이 다가왔고 나는 엄마, 아빠가 어떤 생일 파티를 준비하셨을지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생일 일주일 전,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친구들을 초대하라고 하셨다.


“아들. 친구들 보고 16일 12시에 롯데리아로 오라고 하면 돼. 알았지?”  


정말이지 9살의 나는 패스트푸드 햄버거를 먹으며 생일 파티를 한다는 건 부잣집 애들이 드라마에서나 하는 생일 파티라고 생각했다. 평소 비싸고 몸에 안 좋은 패스트푸드는 엄마가 근처에도 못 가게 했는데, 생일 파티를 거기서 열다니! 엄마의 말을 듣고 신이나 팔짝팔짝 뛰며 소리를 질렀다.


1999년 4월 16일, 나의 9번째 생일엔 롯데리아에서 친구들과 데리버거를 먹었다. 9살의 나는 햄버거를 먹는 것만으로 생일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정말 그것만으로 행복했다. 그날은 기억에 남는 행복한 하루였다. 


그 후 경제적으로 더 어려워져 더 이상의 생일 파티는 없었다. IMF가 터지고 전 국민이 나라를 살려야 할 정도로 힘든 시기에 롯데리아에서 햄버거 생일 파티를 연 엄마, 아빠. 생계 꾸려나가기도 벅차고 힘드셨을 30대의 우리 엄마, 아빠. 며칠 전 아빠의 생신을 챙기며, ‘99년의 엄마, 아빠는 어땠을까? 생각이 들었다. 9살 아들을 위해 힘들고 부담스러워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 그 마음으로 무리해서 생일 파티를 열어주셨을까? 아들이 마냥 행복해하는 모습을 그날 하루 보기 위해서. 


2023년, 나도 이제 그 아련하게 아름다운 마음이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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