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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 모델을 한번 찾아봐

챕터 : 요즘 것들의 사생활 : 먹고사니즘

by 재민

사실 내가 길고 긴 퇴사 생각을 시작한 이유는 현상 후에 찾아온 현타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종의 결정적인 트리거가 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은 ‘광양 아파트 현상’이 끝나고 곧바로 다른 아파트 프로젝트의 사업계획승인(인허가 절차 중 하나)을 준비하면서 일어났다.


현상 후 3일간의 휴가를 다녀온 뒤 바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눈 떠보니 매일 막차를 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김없이 야근 때문에 회사 근처 중국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데 김 소장이 나와 신입사원을 앞에 두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회사에서 롤 모델을 한번 찾아봐.”


딱 나에게 필요했던 질문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생각을 끌어내 준 질문이었다. 나중에 종종 김 소장 덕분에 퇴사 생각이 시작됐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질문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 회사에 롤모델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Role model, 롤 모델 : 자기가 해야 할 일이나 임무 따위에서 본받을 만하거나 모범이 되는 대상.


처음에 롤모델이 없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닮고 싶은 어른의 부재였다. 나보다 5년, 10년, 20년 앞서 있는 어른들 중 닮고 싶은 사람은 회사에 없었다. 이건 커리어적으로도 그렇고 인간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다 각자의 상황이 있겠지만 모두 내게 부정적이거나 내가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모습만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들 무엇을 위해 일하길래 저렇게 이기적이고 정치적으로만 보였던 것일까? 멋진 어른이 없는 이 회사에는 롤모델이 없었다.


롤모델을 고민하니 예전에 누나가 해준 말이 기억났다. 누나는 첫 회사를 퇴사할 때, 점점 나아지겠지 했지만 나아지는 건 없었고 여기 남아있으면 결국 미래 누나의 모습이 회사 팀장의 모습이겠다고 생각하면서 퇴사했다고 한다. 누나는 팀장과 같은 모습으로 살기 싫었다고 했다. 나도 그렇지만 많은 직장인이 이 생각을 하지 않을까.


나의 미래의 모습은 어떻게 될까? 나도 5년 뒤에는 대리님의 모습일까? 그 후에는 차장님, 부장님 결국에는 소장님처럼 되는 걸까? 내가 노력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꼰꼰 건축의 구조에 따라 내가 저런 틀에 갇히게 될 것 같은 두려움이 나를 감싸았다. 하지만 난 그렇게 되기는 싫었다. 정말 더 좋은 미래는 없는 걸까? 롤모델이 없는 이곳에서 나는 어떤 미래를 그리고 누구를 쫓아가야 할까?


김 소장의 롤모델 설교가 있고 난 뒤 며칠이 지나 알게 되었지만, 애초에 나는 존경하는 사람이나 롤모델이 없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 존경하는 인물에 대한 숙제를 받으면 당혹스러웠다. 내 삶을 누구랑 똑같이 살고 싶지는 않다는 단순한 생각 때문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미디어에 나온 사업가, 과학자, 연예인 하다못해 부모님을 꼽는데 그깟 롤모델이 뭐라고 그렇게 한 ‘인물’로 내 삶을 그리는 게 싫었을까? 어쩌면 그때부터 요즘 말하는 레퍼런스만 필요했을지 모르겠다. 나는 존경하는 인물보다는 ‘나’ 다운 삶을 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롤모델을 찾아보라는 질문이 들어왔을 때 당연히 나에게 이상적인 인물은 없는 게 마땅했다. 그래도 내가 30년을 살면서 굳이 존경하는 인물을 뽑자면 딱 이렇게 꼽겠다.


첫 번째 우리 아빠와 엄마. 이건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게 우리를 키우며 삶을 지켜왔는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 집이 빚에 허덕이면서도 어떻게든 생계를 유지하셨고 아빠가 하던 사업이 무너졌을 때도 부모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 힘든 일이 심지어 한국이 아닌 머나먼 타지, 태국에서 일어났다고 하면 믿을까? 이런 힘든 일을 겪으시면서도 부모님은 삶을 살아내셨고 결국 우리 집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요즘은 정년퇴직을 넘긴 연세에도 아빠가 꿈을 향해 도전하고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 정말 존경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럼 부모님 외에 좋아하며 존경했던 사람은 누가 있었을까? 내 고등학교 시절을 불태웠던 두 명의 존경스러운 사람이 있었다. 한참 기타와 음악에 뼈져 살던 나는 기타리스트 이병우와 영국 맨체스터 출신 밴드 오아시스의 노엘 갈리거를 좋아했다. 정말이지 그 둘은 내 노트북 배경 화면을 꿰찼을 정도니까. 이병우와 노엘은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끝내주는 작곡가이다. 물론 장르나 스타일은 달라도 그들의 창조적인 능력에 나는 매료되어 고등학생 때 마음을 다해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들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었고 나의 우상이었다.


그 후에는 존경한 인물이 마땅히 없었다. 존경할법한 사람은 많았지만, 진심으로 팬이 되어 존경한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우리 학교 출신이라는 영국의 유명 건축가 노먼 포스터도 내 마음을 사로잡진 못했으니 말이다.


‘롤 모델이 없는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꼰꼰 건축을 퇴사하고 싶었던 첫 시작은 내 미래를 여기서 그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닮고 싶은 사람도 없었고 쫓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현상이 끝나고 오는 현타에 미래를 그릴 수 없는 현실은 ‘문제’가 있었다. 그래도 건축을 꾸준히 공부해왔고 업으로까지 삼았는데 인제 와서 보니 문제라니…. 이때부터 누군가를 쫓아가지 않고 나다운 삶을 살고 싶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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