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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의 취업 1

무너진 후, 나는 뭘 해야 할까?

by 재민

정신건강의학과를 통원하는 백수는 그렇게 행복하지 않다. 그렇다고 그렇게 슬프지도 않다. 정신과 약의 도움도 있었겠지만 백수생활에는 기쁨도 슬픔도 느낄만한 큰 이벤트는 없었다.


내가 유일하게 하는 일이 있다면 무너지면서 나온 폐기물들을 모아서 버려야 했고—나 같은 경우에는 건축을 그만두면서 나오는 불안과 후회 같은 잔잔바리 감정들이 그것이었다—이제 텅 빈 인생에 뭘 어떻게 지을지 궁리를 해야 했다.


후보군들은 예상외로 주변 사람들의 조언에서 나왔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의 고통을 지켜본 애인은 조심스레 공인중개사 시험을 권했다. 국가가 인정해 주는 자격증과 꽤나 쏠쏠할법해 보이는 부동산 시장으로 뛰어드는 건 어떠냐고 했다.


손끝만 스쳐도 서로 화를 내는 사이인 우리 누나는 일단 내가 하고 싶은 일인 글쓰기를 반대했다. 글이 팔리려면, 그걸 직업으로 만들어 수익을 얻으려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어쩌면 연예인과 인플루언서로 뒤덮이고 있는 출판계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결국 또 티격태격하다가 서로 소리를 지르고 대화가 끝이 났다. 그럼에도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책을 내는 것 또한 그럴싸해 보이기는 했다.


엄마는 특정 직업을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어디서 보셨는지 타일이나 도배 같은 인테리어 관련 기술을 배워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 건축 설계를 했으니 도면도 잘 볼 테고 몸은 힘들겠지만 사실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니…. 물불을 가리는 걸 보니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보다 —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니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현재 내 현실에 매력, 꿈, 낭만 같은 걸 찾을 시점은 아닌 듯한데, 또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작가도 하면서 “그럴싸한 직업”을 갖고 싶은 마음이 또 생겨나는 듯했다. 마침 이런 고민 중에 의사 선생님을 만나야 할 진료날이 돌아왔다.



의사 선생님 : 불안감이 많이 내려갔지만 아직은 좀 갖고 계신데, 글은 잘 써지세요? 집중도 잘 되나요?


나 : 글은 너무 잘 써져요. 하루에 두세 개씩 쓰기도 해요. 집중도 잘 되는 편이에요. 그런데 이제 생계를 어떻게 이어 나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의사 선생님 : 우리가 퇴사를 할 때 건축 설계든, 어느 정도 높은 연봉을 포기했잖아요? 이유는 환자분에게 글 쓰는 작가로 살아가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었어요. 아직도 그렇게 느끼시나요?


나 : 네. 맞아요.


의사 선생님 : 그렇다면 이전처럼 책임감이 너무 많거나 부담이 되는 일 대신에 생계를 유지하되 작가로서의 일이 최우선 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세요.


나 : 그렇다면 뭐 아르바이트나… 프리랜서나… 간단한 사무직 같은…?


의사 선생님 : 네. 이전 회사를 들어갔을 때 사회적 시선이나 가치를 따져서 들어간 걸 생각해 봤을 때 이전과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된다면 똑같은걸 또 겪을 확률이 높아요. 그건 재민 님이 무엇을 선택할 때 갖는 패턴 일 수도 있어요. 또 참아야지, 억지로 해내야지 하면서 말이에요.


나 : 그렇다면 제가 마음이 가면서 업무강도가 낮은 직업을 찾아봐야겠네요?



진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생각을 했다. 공인중개사, 어떤 분야의 전문가, 타일공, 도배, 그 외에도 영어 강사, 영어 회화 과외, 번역가 등등. 나에게는 내 스펙과 경험으로 도전할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다. 여러 분야의 직업을 추천해 준 가족과 지인, 애인에게는 모두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라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딱히 좋지도 않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백수생활이 딱히 슬프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오히려 주변에서 추천받은 건축가를 대체하는 직업들은 부담스럽고 무서웠다. 시험을 봐야 하고 학원을 다녀야 하고, 계약된 시간 이외에도 많은 노력을 하지 않으면 직업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명료했다. 글쓰기로는 고생하고 싶은 마음. 공황이 오고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잠을 못 잘 정도로 불안해도 “이러다가 퇴사하면 <퇴사 사유서2> 써야 하는 거 아냐?”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 물론 그때는 심각하게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 글쓰기는 매력적이고, 가치 있고, 즐겁고, 설레는 일이었다.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글 쓰는 일을 최우선으로 내가 병행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나는 비록 현실적인 사리분별하는 데는 재능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현실적인 경계선을 세우기 시작했다. 가령 일주일에 5일 이하로 근무할 것. 야근이 없는 일일 것. 책임감이 막중하지 않을 것. 앉아서 컴퓨터만 하는 사무직이 아닐 것. 활자가 작업에 들어가지 않을 것. 최저시급을 고려해 주 32시간에서 40시간 사이의 일일 것. 현실적인 조건을 달다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명쾌하게 줄어들었다.


이 조건들을 아르바이트 구직 사이트에 필터로 설정하니 나오는 것은 바리스타, 매장 판매 아르바이트, 서점 스태프, 주방보조, 빵집 알바.


정말이지 지인들의 추천을 받았던 직업들보다 덜 그럴싸한 것들이 나왔다 — 마치 대학생이 할법한 그런 아르바이트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자꾸 이런 아르바이트라면 글쓰기와 병행할 수 있겠다고 느껴졌다.


내 나이 서른다섯. 전 직장에서 과장 직급을 달고 나온 내가 갈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을까? 자신도 없고 이게 실제로 가능할까 의심이 갔지만 나는 곧장 22군데에 아르바이트 지원서를 넣었다.


- 2편에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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