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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 무너질 결심

외피부터 기초까지 모든 게 무너져야 했다.

by 재민

붕괴사고 보고서(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아보고 난 후 선택지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퇴사 혹은 버티기. 퇴사는 내가 회사에 지는 것 같아서 싫었고, 치료를 받으면서 현실에 처한 내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나는 버티기를 선택했다.


생각보다 회사에 정신질환을 가지게 되었다는 걸 말하는 것은 쉬웠다. 그게 머리나 마음으로만 아픈 게 아니라 몸으로까지 튀어나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차피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장님과는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서 치료와 회사생활을 병행해야 하는 나의 상황을 공유했고 소장님은 언제든 휴가를 쓰지 않고 병원에 가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일이 터졌다. 정신과 약을 먹으면서도 불안과 우울, 공황은 진정되지 않았다. 다시 공황장애가 오고 그것이 방아쇠처럼 당겨져서 극도의 불안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회사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 없어 지하 1층에 있는 회사 휴게실로 향했다. 뭐라도 마시면 진정이 될까 싶어(바보 같은 생각으로 들리겠지만, 어차피 나는 이미 정상적인 사고를 못하고 있었다) 포카리스웨트 한 캔을 자판기에서 뽑았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 나가 엄마께 전화를 걸었다.


나 : 나 더 이상 못 버티겠어. 그냥 퇴사하고 싶어. 내 상태가 정말 말이 아닌 것 같아. 머리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고장 난 것 같아.


엄마 : 너무 힘들면 그만둬도 괜찮아. 이렇게 힘든데 회사를 어떻게 지금 다니고 있어.


나 : 회사를 계속 다녀야 돈을 벌 수 있으니까 다니는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벌써 때려쳤는데…. 나 근데 너무 힘들어.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엄마 : 살려고 일하는 거지 일하려고 사는 거 아니야. 엄마랑 아빠는 괜찮으니까 퇴사해 돼.


나 : 근데 현실이. 현실적이 대안이 없어. 회사를 다녀야 돈을 벌고 살아갈 수 있잖아.


엄마 : 잠깐 돈 좀 안 벌면 어때? 모아 둔 도 없어? 아니면 엄마집 와서 밥만 먹고살아. 그래도 괜찮아.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해도 괜찮아.


나 : 나 이 직장을 잃으면 내가 망가질까 봐 너무 불안해. 내 인생이 무너질까 봐 무서워.


엄마 : 퇴사도 한 번 해봤는데 괜찮았잖아. 뭐 때문에 퇴사를 못하고 이렇게 버티고 있는 건데. 너 이렇게 힘든데 왜 버티는 건데.


나 : 돈…. 돈 때문이야. 현실적으로 더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어. 현실적인 대안이 없어!


나는 엄마와의 통화를 통해 내가 원하는 이상을 알았다. 월급 300만 원을 받으며 건축사사무소에서 일하는 건축가라는 타이틀에 주말에는 작가로 활동하는 그럴싸해 보이는 삶, 어쩌면 내가 2년 동안 누려왔던 삶을 이어가는 게 내 이상이었다. 하지만 정신질환은 예고 없는 태풍처럼 휘몰아쳤고 나의 현실은 회사를 못 버티고 퇴사해서 백수로 우울하게 살아가는 내 모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버틸 힘도 정신머리도 남아있지 않았다. 너무 화가 났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포카리스웨트 캔을 땅바닥에 내려 찍었다. 안에 담겨 있는 음료가 튀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서너 번을 울다시피 내려치니 캔이 혼자 서있지 못할 정도로 찌그러졌다. 그 모습이 나였다.


그렇게 극심한 불안과 우울이 찾아오고 나서 나는 반반차를 쓰고 퇴근했다(다행히 나의 상태를 알아봐 준 소장님의 재량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침대 누워서 자고 싶었다. 정신과 약을 먹고 있었지만 약이 미미했는지 나는 각성 상태를 잠재울 수 없었다. 뜬 눈으로 밖이 어둑해질 때까지 생각만 했다.


선택지는 퇴사 혹은 버티기였는데 나는 버티기를 할 수 없었다. 오늘 같은 날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일어나면 나는 정말 버틸 수 없을게 눈에 보였다(찌그러질 미래의 포카리스웨트 캔을 위해 그럴 수 없었다). 그러면 퇴사 밖에 선택지가 남지 않는 것인데 이렇게 병들어 쇠약하게 퇴사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퇴사한 후에 깜깜해질 내 인생이 너무 무서웠다. 그러던 와중 나의 창의력(이 와중에?)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휴직! 그래 휴직이야!


나는 다음날 소장님께 휴직 이야기를 꺼냈다. 소장님은 (아주 감사하게도) 허락해 주셨고, 제정신이 아니었던 나를 위해 본부장님과 인사팀과 협의도 일사천리로 끝내주셨다. 그렇게 나는 무급휴직으로 회사원의 신분을 유지한 채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공황 발작이 일어난 순간부터 휴직까지 모든 일이 폭풍처럼 휘몰아쳤고, 이런 내 결정을 정신과 선생님께 이야기하자 조금 걱정이 든다고 하셨다. 너무 충동적이었고(물론 휴직을 하면서 정신머리가 좋아졌지만) 이런 내가 일련의 선택을 하는 중에 강박이나 스스로를 괴롭히는 패턴이 나타날 수 있어서 일단을 지켜보자고 하셨다.


휴직을 시작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엄마 집에 가는 것이었다. 일주일 동안 본가에서 엄마, 아빠와 지내면서 그동안 꽉 차 있던 마음을 비워내는 시간을 가졌다. 글도 쓰고, 차도 마시고, 할먼네 밭에서 상추와 고수를 수확하고. 그러다 보니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애인과 강릉 여행을 갔다. 거기서도 글을 썼고 커피를 마시고, 그냥 지나가다 들린 해변에서 책도 읽고 밤바다를 즐겼다. 그렇게 회사, 업무, 책임감뿐만 아니라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무너진 나를 어떻게 재건축할 것인지 모든 걸 잊어버린 채 온전히 마음이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오랜만에 느낀 자유와 행복이었다.



보통 늦은 여름에 찾아오는 태풍은 한 번만 오지 않는다. 초 가을까지도 태풍을 휘몰아친다. 내 마음에도 역시 두 번째 태풍이 불었다. 강릉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현실에 대한 불안감이 심해졌다.


휴직은 했지만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불안해서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건축 설계가 아니고 어떤 밥벌이를 할 수 있을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떤 날은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집 안에 있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계속 잠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것도 맘대로 되지 않았다. 입맛도 없었고 그냥 꺼이꺼이 울어볼까 생각이 들었다. 다음 정신과 진료날이 돼서야 이런 상태를 의사 선생님께 털어놓았다.


의사 선생님과 길게 이야기하면서 정리된 것은, 결론적으로 나는 휴직을 했지만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나는 나름 창의적이라고 생각했던 휴직이 나를 불안과 우울에 묶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돌아가야 된다는 두려움, 돌아가도 똑같은 일들이 반복될 것이라는 안 좋은 생각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나는 다음날 소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휴직 15일 만에 나는 휴직이 아니라 퇴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소장님은 깊게 캐묻지 않으셨다(나름 내가 다른 회사로 이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셨겠지만 내 목소리가 힘이 너무 없었는지 묻지 않으셨다). 나는 끝까지 해맑지 않은 말투로 조만간 회사에 가서 서류정리와 사직서를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내 속은 일단 회사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이 들어 좋았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퇴사를 하게 될 줄 몰랐다는 자괴감이 들어 시큰했다. 그래도 되돌아보면, 한 가지 선택지 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두려워 요리조리 피해 다니다가 결국 정면으로 마주한 내가 대견했다. 와르르 무너진 나를 더 완벽하게 무너뜨리기 위해 먹은 용기가 대견했다. 워낙 재건축을 하려면 지하까지 다 부숴버리고 새롭게 지어야 하니까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니면 요즘 유행하는 아파트 리모델링 사업 정도였을 테니까.


나는 퇴사를 하면서 비로소 완벽하게 무너졌다. 눈에 보이는 지상층뿐만 아니라 지하주차장과 그 밑에 땅 깊이 파여있는 기초까지도 무너졌다. 뿌리까지 흔들어 뽑아 버린 건물은 앞으로 어떻게 재건축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불확실한 미래뿐. 어찌 되었는 일단 나는 서른다섯 살에 수입도 없고 미래 계획도 없는 백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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