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조현병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그날부터 엄마는 당장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밖으로 일을 찾아 나섰다. 갖은 풍파를 겪느라 그녀는 경력단절 여성이 되었으나 불행중다행은 대학교를 나온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고학력자였으므로 나름 심사숙고하여 회사에 들어갔다.
엄만 참으로 똑똑한 여자였다. 일도 잘했고 능력도 좋았다. 사원에서 1년 만에 팀장을 달더니, 몇 년 만에 지국장을 하고 그 뒤로는 심사를 거쳐 국장까지 올랐다. 지역 곳곳에서 강의 요청도 들어왔고, 그때마다 강의는 평가는 최고점을 받았다. 강남에서 스카우트를 해갔고, 해외지사로 발령 제안도 있었다. 엄마의 지국은 최고의 성과를 올리며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엄마는 너무나도 바빴다. 야근은 기본이요, 새벽에 들어오는 일도 잦았다. 다른 지역에 강의라도 있는 날이면 새벽 5시에 출발해야 했다. 엄마의 얼굴을 본 지가 까마득하게 여겨졌다.
그럼에도 엄마는 아침마다 우리가 먹을 밥을 해놓고 갔다. 간간히 저녁밥은 잘 챙겨 먹었냐고 전화가 걸려왔다. 잘 먹었다 너무 맛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얼른 끊는다. 밥을 못해놓고 가거나 재료만 꺼내놓고 갈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메모가 쓰여있었다. '오늘은 바빠서 못 해놓고 가 미안, 김에 싸 먹고 냠냠' 엄마의 메모를 하나씩 다이어리에 모아두는 것이 나의 일상이 되었다. 너무 서러울 때 한 번씩 꺼내서 보려고.
주말만 손꼽아 기다리던 나와 동생들은 토요일에 일을 나간다는 엄마에게 실망했다. 일이 밀려서 다 못 끝내고 온 것이다. 그럴 때는 엄마가 우리들을 데리고 회사를 같이 나갔다. 나는 옆에서 엄마 회사 봉투를 접거나 스티커를 붙이거나 하는 자잘한 잡무를 했고, 동생들은 앉아서 그림 그리기를 했다. 오후쯤 되면 일이 끝났는데, 같이 늦은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항상 맛있는 음식을 사주었다. 가끔은 유행하는 패밀리레스토랑이나 뷔페 등을 데려갔다. 어린 우리들에게는 신세계가 펼쳐져있었다.
일요일에는 홈플러스로 장을 보러 가야 했다. 한창 크던 나이라 하루에 우유를 두통씩 먹어대던 시절이었다. 주로 고기, 햄, 과자, 우유, 시리얼을 많이 샀다. 항상 엄마는 가격대를 비교하고 벌크로 된 제품들을 골라 담았다. 그렇다 보니 장바구니는 기본 4개씩 나왔는데, 무게가 상상이상이었다. 내가 두 개를 들고 엄마가 두 개를 들면 딱 맞았다. 손가락에 비닐봉지끈이 파고드는데, 이러다가 손가락이 빠지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늘 하고는 했다. 엄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꿋꿋이 나를 데리고 마을버스를 타고 홈플러스로 향했다.
내가 중학교를 입학하니 엄마에게는 큰 미션들이 주어졌다. 평상복을 입던 초등학교때와는 달리 교복을 맞춰야 했고, 가방을 새로 사야 했고, 체육시간에 입을 체육복이 필요했다. 교복과 가방은 미리 사뒀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중학교를 입학한 지 이틀차에 체육시간에 입을 체육복을 가져오란다. 당장 내일. 당시 나는 키가 겨울방학 사이에 13cm가 컸기에, 집에는 맞는 운동복이 없었다. 참으로 곤란한 일이었다.
엄마가 저녁에 밥은 잘 먹었냐고 전화가 걸려왔을 때, 사실대로 말했다. 내일 당장 체육복이 필요하다고. 엄마는 '뭐라고? 그걸 왜 이제 말해. 당장 버스 타고 홈플러스로 나와'라고 외쳤다. 엄마는 강남에서 한 시간이 걸리는 우리 집 근처까지 단숨에 왔다. 옷가게들은 거의 문이 닫아가는데, 그중에 열려있는 곳을 들어가 최대한 튀지 않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재질로 운동복을 샀다. 그 체육복은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입었다.
엄마는 평일에 거의 볼 수 없었지만 주말 하루만큼은 우리를 위해 애를 썼다. 어떤 날은 궁궐을 데려가기도 하고 시청 앞의 스케이트장에 데려가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에도 일을 나간 엄마는 우리에게 미안했는지 퀵으로 뮤지컬관람권을 보냈다. 당장 애들 옷을 입히고 예술의 전당으로 가라고 전화를 받은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지하철을 탔다. 예술의 전당을 찾아가 동생들과 좌석에 앉았는데 온통 땀인지 눈물인지가 주룩주룩 났다.
엄마는 강인했고,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자살시도했던 그날도 아빠를 병원에 입원시키던 그날도 엄마는 울지 않았다. 딱 하루 회식으로 술을 먹고 들어온 엄마가 엎드려서 대성통곡을 하는 일이 있었다. 동생들은 잠들어 보지 못했지만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용히 엄마 곁으로 가 눈물을 닦을 손수건을 하나를 옆에 놓아두고 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본 마지막 눈물이었다.
우리를 키워내던 엄마 나이가 되고 나니,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했구나 알 수 있었다. 사회생활이란 녹녹지 않은 것이었고 부당한 일이 너무도 많다. 게다가 남편 없이 자식들을 셋이나 키워내는 일은 더욱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남편이 아예 없기라도 하면 어쩔 수 없지 계속 아들을 때리는 남편 때문에 내내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집에 보호자는 둬야겠는데, 아들이 엇나갈까 봐 걱정되는 이중적인 마음은 참으로 힘들다. 인생의 문제는 돌발적으로 생겼고, 그것을 해결하는데 힘을 쏟아도 시간이 모자랐다. 하루하루 해치워나간다는 심정으로 살았다. 그렇게 살았기에 엄마의 사고 방향은 무엇이든 해결해 내는데 맞추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