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서 친한 친구 3명을 사귀었다. 친구들은 전부 우리 집 옆 아파트, 그 옆 아파트 신호등하나만 건너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그랬기에 우리들은 하굣길을 함께했다. 고작 1분 거리를 서로 번갈아가면서 데려다주었다. 늘 교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면서 30분을 넘게 수다를 떨어댔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도 즐거웠다. 사춘기 시절 우정은 너무나도 대단한 것이었다. 붙임성이 좋은 탓에 친구들 가족들과 잘 어울렸다. 물론 친구네 가족의 좋은 인품도 있다. 집에 가는 것보다 친구들 집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집에 가도 아무도 없으니까.
한 친구네 가족은 아버지가 대기업에 상무였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다. 다소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면모가 있었으나 편안하게 놀다 가라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어머니는 내가 놀러 가면 꼭 저녁을 먹고 가라며 밥을 챙겨주셨다. 아마도 내가 늦게까지 집을 가지 않으니 집에 엄마가 없다는 것을 눈치껏 아셨던 것 같다. 늘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종종 저녁을 얻어먹고 돌아갔다. 어머니의 따듯한 밥을 먹을 때면 동생들이 한 번씩 밟혔다. 미안하기도 했지만 나도 누군가의 챙김을 받고 싶은 나이었다.
두 번째 친구네 가족은 아버지가 무역회사에 다녔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다. 친구가 첫째였고 밑으로 동생이 둘이 있었다. 그 친구집에 놀러 가면 항상 센세이션 했다. 친구네 가족의 분위기는 굉장히 프리하고 늘 웃음이 많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집에서는 늘 영어만 썼다. 그것은 나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가끔은 못 알아 들어서 왓? 하고 물어보기도 했다. 대형스크린으로 매일같이 영어로 된 뮤지컬이 흘러나왔다. 저녁에 불을 꺼놓고 가족끼리 옹기종기 모여서 뮤지컬을 감상하는 것이 일과였다. 나도 거기에 껴서 어머니가 만들어주는 간식을 집어먹으면 꼭 같은 가족이 된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또 다른 친구네 가족은 아버지가 소니 부사장이었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이자 재테크를 하시는 분이었다. 당시 소니는 굉장히 핫한 일본의 기업이었다. 굳이 자랑하지 않았어도 그 친구의 모든 전자기기는 소니였다. 그 친구는 우리들에게 돈을 쓰는 것에 아낌이 없었다. '아빠가 너희들이랑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용돈 주셨어'하며 떡볶이를 쏜 적이 많았다. 늘 배고픈 사춘기 시절에 떡볶이란 거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나는 그럼 튀김도 시켜도 돼? 하고 묻고는 김말이와 당면 만두를 시켰다. 정말이지 꿀맛이었다.
어느 날은 다 같이 떡볶이를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한 어머니가 친구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친구는 엄마와 건물을 보러 가기로 했다며 다음에 떡볶이를 같이 먹자고 이야기하고는 얼른 뛰어갔다. 재테크를 하시는 어머니는 친구를 어릴 때부터 데리고 다녔던 것이다. 훗날 그 친구는 강남 4번 출구 앞의 한 가게에서 알바를 했다. 딸에게 노동의 가치를 알려주기 위해 자신 건물의 알바자리를 주었다.
더 이상 순수하게 뛰어놀던 초등학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정의 차이도 알게 되었고, 교육의 차이도 알게 되었다. 당시는 아빠가 돈을 벌어오고 엄마가 가정주부로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친구들 집에 엄마가 있는 것이 부러웠으나 한편으로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존재했던 집안의 남성이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본 적이 없는 남성의 역할이라는 것이. 친구 집에 갈 때마다 몰래 생각하고는 했다. 친구네 집에 내가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혼자 망상을 하고 돌아온 집에는 컴컴한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춘기의 나는 내가 이런 가족을 만난 것이 어찌나 억울하고 어찌나 서럽고 어찌나 우울하던지. 누가 나를 구해주면 좋겠다, 이게 꿈일 수도 있잖아, 혹시 자고 일어나면 다른 세상일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했다. 이제는 안다. 친구네 가정에도 사연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을 뿐. 누구나 아픈 이야기하나씩은 가지고 산다는 것도 알고 있다. 설사 사연없는 마냥 행복한 가정이라면 또 어쩌겠는가. 그렇게 타고난 것도 그들의 복인 것을. 그저 나에게 따듯한 온정을 베풀어 주었던 친구네 가족들에게 감사하면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