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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로 Oct 02. 2023

15. 꿈이 꺾인 나

"네 그림 실력은 홍대 앞 애들의 새 발의 피야"


구석에서 이것저것 그리다 보면 선생님이 와서 잘한다고 칭찬해 주는 것이 좋았다. 도화지에 형태가 그리고 마음대로 색을 칠 할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일찍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안 엄마는 나를 미술학원에 보내주었다. 여동생도 미술을 좋아해 일 년 뒤에는 함께 다니게 되었다. 초등학생 둘이서 일주일에 3번 정도 학원을 갔었다. 원장님이 일주일마다 프로그램표가 바뀌었는데, 하루는 소묘 하루는 파스텔 가끔 천사점토와 같은 당시 유행하는 다양한 질감의 점토를 가지고 형태를 만드는 조소도 했었다. 


공부는 그렇게까지 재미가 없었는데, 가서 미술활동만 하면 시간이 잘 갔다. 중학교 때는 나이가 있기에 학원가격이 올라 일주일에 2번으로 줄이게 되었다. 그래도 갈 수 있는 게 어디인가 싶어 갈 때마다 최대한 오래 있으려고 했다. 그렇게 취미생활로 미술을 꾸준히 했으면 참 좋았으려 만, 문제는 중학교 3학년 때 있었다. 바로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당시 친한 친구가 서울예고를 가겠다며 입시미술을 시작하였다. 사생대회를 하러 보라매공원으로 갔는데, 친구의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몇 번의 붓터치로 투명한 꽃잎이 만들어지고, 빛반사각을 정확하게 살린 잎사귀가 청량하게 빛나고 있었다. 붓의 터치가 적었고 물감의 색깔이 분명 몇 가지 안 들어갔는데, 화면이 풍성하고 깔끔한 느낌. 너무도 충격을 받았다. 그에 비해 나의 그림은 붓의 터치가 자잘하고 매우 많았으며, 물감의 농도를 조절한답시고 색을 여러 가지를 섞어 난잡하게 표현했다. 내 그림은 불투명하고 텁텁한 것이 어두워 보였다. 스스로 굉장히 실망했다. 하필 중학교 3년 때의 담임은 미술선생님이었다. 가장 늦게까지 그림을 그린 나는 울상을 하고 선생님께 제출하러 갔다. 이미 친구는 그림을 제출하고 다른 친구들과 놀고 있었다. 선생님은 웃으며, '너의 그림이 훨씬 정성이 많이 들어간 좋은 그림이야.'선생님의 말에 큰 위로를 받고 조용히 자리로 돌아가 물감을 정리했다. 친구는 최우수상 나는 우수상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미술학원의 원장님은 나를 불러 이제 더 이상 가르쳐줄 것이 없으니, 홍대 앞으로 입시미술반을 다녀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였다. 몇 개월 스킬만 익히면 될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다. 중학교 담임 선생님도 서울예고라는 곳이 있는데, 한번 지원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진학상담을 해주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꼭 벌써 화가가 된 것 같고, 단전 어디선가에서 끓어오르는 자부심 같은 것이 샘솟기 시작했다. 


늦게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에게 신이 나 말을 했다. 서울예고에 가고 싶다고. 홍대 입시미술 학원을 보내달라고. 엄마는 한숨을 쉬면서 '네가 무슨 미술이야, 홍대 앞 애들 그림 봐봐 너는 걔들 새발의 피야.' 충격을 먹은 나는 미술학원 원장님과 담임선생님의 이야기도 했다. 그러나 엄마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난생처음으로 나는 엄마에게 일주일간 항의를 했다. 먹지 않고 자지 않고 엄마가 보일 때마다 예고에 가고 싶다고 졸라댔다. 그러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당시 엄마를 향한 원망과 분노는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친구와 비교하면서 절망하고 우울했다. 그리고 무척이나 서러웠다. 그럼 나는 서울여상에 가겠다며, 특성화고등학교에 가 좋은 서울의 대학교를 진학하겠다며 박박 우겨댔다. 엄마는 상고에 대한 좋지 않은 옛날 어른이었으므로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친한 친구는 서울예고에 진학하였고 나는 집 앞의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죽어라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서울예고에 진학하지 못하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당시 홍대 앞의 입시미술학원의 한 달 비용이 100만 원이었다. 엄마 혼자 생계를 꾸리고 있었기에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동생들이 줄줄이 중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게다가 미술적 감각은 나보다 여동생에게 더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공부도 어중간하게 했고, 미술도 적당히 잘했다. 예체능을 하는 아이가 있으면 집안의 뿌리가 뽑힌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그걸 둘이나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중학생인 나는 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의 꿈을 생떼 부려보았다. 




훗날 성인이 되어 관상과 손금을 보는 곳에 들어갔는데, 역술인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원래는 예체능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현실과 타협을 했네. 안타깝네요.' 신기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그 말을 듣고 괜찮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사실 조금은 속이 쓰렸다. 그래도 어쩌겠어. 이것도 내 인생인데.


대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굳게 했다.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 장학금으로 등록금을 냈고, 알바를 간간히 하면서 생활비를 벌어 썼다. 공부를 열심한 탓에 교수님의 눈에 띄어 대학원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공부를 더 하겠다 마음먹은 나는 엄마에게 대학원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또 무슨 대학원이야, 네가 학계에 한 줄을 그을 것이라는 착각하지 마.' 또 엄마는 나의 꿈을 접게 하는 말을 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더 이상 중학생이 아니었다. 나 스스로 알아서 하겠다고 이야기하고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감당할 수 없는 미술학원 비용 때문에 모진 말을 한 엄마의 심정과 사회에 빨리 나와 자리 잡기를 바란 엄마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정말 그렇지만, 내게 그렇게까지 말을 했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엄마도 처음이라 힘들겠지만 나도 자식이 처음이라 상처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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