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살 터울이 나는 여동생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성격을 지녔다. 감성적이고, 작은 것에 행복할 줄 알고, 잘 웃는 아이다. 단지 어릴 적부터 잘 먹지를 않아서 고생을 시킨 것 빼고는. 덕분에 먹을 것을 쫓아다니면서 먹였어야 했고, 실실 웃으며 도망가는 여동생을 그냥 놓아줄 때도 많았다. 과거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어린 여동생을 끌어안고 찍은 사진이 많다. 참으로 애지중지 키웠달까.
여동생은 나와 함께 미술학원을 다녔다. 나는 미술의 꿈을 접고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무렵 여동생은 중학교까지 미술학원을 계속 다녔다. 그리고 여동생에게도 예고 입시반을 추천했다. 예고를 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엄마는 여동생에게 입시 미술은 어렵고 취미로 둘 수 있게 학원을 보냈다. 여동생은 어느 정도 상황을 인지하고 그저 미술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정말 대학교 입시 미술을 시작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고등학교 진학 입시 미술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엄마도 여동생에게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공부를 좀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고, 동생은 공부 학원에 다녔다. 그러나 여동생은 울면서 2주 만에 공부를 그만하고 싶다고 했다. 한 달도 되지 않아서 학원을 박차고 나왔다.
"난 공부랑 안 맞아, 난 미술시켜줘." 여동생의 단호한 말에 엄마는 바로 수긍했다. 그렇게 동생은 미대 입시를 시작했다. 형편이 되지 않아서 금전적으로 친인척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감사하게도 큰 이모네, 작은 이모네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동생의 입시미술에 돈을 보태어주었다. 한 달의 기본 수강료가 100이요, 재료비와 방학 특강까지 합치면 어느 달은 200 가까이 돈이 들었다.
여동생은 꿋꿋이 미술을 했다. 그녀는 학교에 있는 시간보다 학원에서 그림 그리는 시간에 더 눈이 빛이 났다. 단 한 번도 힘들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미술의 입시 경쟁률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당시 어떤 대학은 200:1, 조금 낮은 대학은 80:1 놀라운 것이었다. 정말이지 하늘의 장난이 아닐까 할 정도로 동생은 입시에 실패했고, 재수를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해 지역 국립대학교의 시각디자인과에 진학을 성공했다.
여동생은 서울의 사립대학교 진학을 원했으나 남동생까지 생각하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엄마는 우리 셋에게 국립대학교 가야 한다는 압박을 주었다. 당시 엄마 혼자서 자식 셋을 서울에 사립대학에 보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미 나는 지역의 국립대학교를 선택하여 진학했고 등록금을 내지 않았으며 생활비도 알바로 간간히 벌어 썼다. 여동생은 이런 과정을 보았기 때문에 지역의 국립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기숙사에 들어간 동생은 잘 다니는가 했으나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같이 사는 것이 어렵다며 자취방을 구해달라고 했다. 엄마는 여동생의 요구를 들어주어 대학교 앞 원룸을 구해주었다. 한날 동생의 자취방에 놀러 갔었는데, 옷들로 이루어진 동굴이었다. 내 몸 하나 누울 수 있는 공간 딱 한자리. 같이 살기는 어려웠겠구나 싶었다.
지역이 답답했던 여동생은 어느 날 휴학을 하고 서울로 가고 싶다고 했다. 편입도 알아보고 반수도 할까 생각했지만 포기하고 잠깐이라도 서울 공기를 마시는 것에 스스로 타협을 했다. 처음에 엄마는 생각 좀 해보자라고 말했으나 여동생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엄마는 보증금을 구해 동생의 서울 자취방을 얻어주었다.
한날은 친한 친구와 만나 수다를 떨다가 여동생은 배짱도 좋다고 투덜대면서 하소연을 했다.
친구가 나의 정곡을 찔렀다.
여동생은 로망이었던 카페알바를 몇 개월 정도 했으며, 주말마다 전시를 보거나 나들이를 다녔다. 그러다 돈이 모자랄 때는 엄마에게 생활비를 보내달라고 했다. 일 년의 서울 바람 쐬기를 끝내고 대학교로 돌아와서는 무난하게 졸업을 했다. 그리고 당장 서울로 올라가겠다며 취업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올라갔다. 지금은 이직을 하고 다니며 서울의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밥벌이를 잘하고 있다.
고등학생일 때도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여동생이 엄마에게 저런 요구를 할 때마다 너무 얄미웠다. 어쩜 저렇게 철이 없을까. 집안 사정은 생각도 안 하나. 속에서 천불이 났다. 한편으로는 엄마에게 원망이 쏟아졌다. 나는 안되던 미술이 동생은 되는 것이고, 자취도 단숨에 시켜줄 수 있는 건가. 나는 남하고 같이 살고 싶어서 이렇게 기숙사 생활을 4년 한 건가. 동생은 되고 나는 안 되는 것들이 비교되면서 이슈들이 생길 때마다 괴로웠다. 부럽고, 질투하고, 속상하고, 자괴감이 들고. 특히나 여동생한테 이런 감정들이 드는 것이 언니로서 못할 짓이라는 자책감도 함께 들었다.
여동생도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니가 하지 못한 미술을 자기가 하고 있을 때 잘해야 한다는 압박도 심했을 것이다. 친척들에게 도움을 받아 미술을 할 때는 힘들다고 말 한마디 못했다. 그런데 여동생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 길이 아니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유일하게 힘들지 않다고 했다. 그에 비해 나는 입시미술을 시켜달라고 일종의 시위를 했으나 여동생보다는 이것 아니면 안 돼하는 절박함이 부족했지 않았나 싶다.
눈치를 상대적으로 덜 보는 성격도 한 몫하였다. 여동생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정확하게 말했다. 나는 늘 속으로 '그래 나까지 그러면 엄마가 곤란하니까 참으면 될 일이야', '나만 조용히 하면 경제적으로 힘든 일은 덜할 거야'하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내가 원하는 것을 명확하고 단호하게 말한 적이 없다. 뭐 해주면 좋지만... 하고 늘 끝을 흐렸던 것 같다. 나름 내 성격에 미술을 시켜달라고 확실하게 했지만 그것이 칼같이 거절당한 경험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데 넘어갈 수 없는 벽이 세워졌다.
나와는 다르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명확하게 요구할 줄 알았던 그녀의 성격과 행동이 부럽고 질투 난 것은 내가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자격지심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