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우리 집에 내 방은 사라졌다. 고등학생이었던 동생들이 방을 하나씩 차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대학교 방학에 집에 오면 나는 거실에서 요를 깔고 잠을 자야 했다. 예민한 동생들의 심기를 건들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도 대학교에 진학할 무렵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였고, 동생들의 방은 곧 창고가 되었다. 특히 남동생 방은 큰 책장이 놓여 있어 각종 전공서적과 공책들을 쌓아놓는 방으로 바뀌었다. 대학원 방학에 잠깐 집에 내려와 있었는데, 그 시기에 남동생도 대학교 방학을 맞아 집에 왔다. 여느 때처럼 난 안방에서 유튜브를 시청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남동생이 안방으로 찾아왔다.
남동생의 손에는 내 일기장이 들려있었다. 남동생 방에 나의 전공 서적들과 섞여 있던 일기장이 있던 것이다. 그것을 본 남동생은 나에게 정신과를 가보라며 상태가 심각한 것 같다고 했다. 일기장은 대학교부터 대학원 때까지 정서적으로 힘들 때마다 쓰던 일종의 감정 쓰레기장이었다. 때문에 그 시간만큼의 분량은 엄청난 것이어서 몇십 권이나 된다. 그런데 그것을 다 봤다고? 나는 온몸이 발가벗겨져 명동 한복판에 세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그저 몸 둘 바를 몰랐다.
무엇보다 화가 난 것은 일기장의 전부를 읽고 손에 들고 온 남동생의 태도였다. 보통 상식선에서는 일기장인 것을 알았다면 조용히 덮어두고 보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닐까. 일기장이 방에 있으니 잘 챙겨두는 것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지 않을까. 속에서 극도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나는 폭발하여 '누가 일기장을 허락도 없이 훔쳐보래?'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남동생의 말이 가관이었는데, '누가 내 방에 일기장을 내버려두래? 보라고 둔 거 아냐?'라고 역으로 소리쳤다. 미안하다는 사과가 아니고, 오히려 내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 내가 창고라고 생각한 너의 방에 일기장을 함부로 둔 것은 잘 못이지만 그것을 전부 다 보고 내게 정신과를 가라고 충고하는 너의 태도는 옳은 것인가. 성인인 네가. 그리고 분출해 내는 화에 실린 저 문장은 과연 맞는 것인가.
다음날 나는 일기장을 싸들고 다시 대학원 기숙사로 향했다. 안타깝게도 수년이 지나도 그에게 사과 한마디 들을 수 없었다. 저 분노에는 그동안 남동생에게 해주었던 갖은 노력에 대한 상실감도 있었다. 그 마음들이 남동생의 처사로 무시당하고 깔봄을 당한 느낌을 받았다. 정신과 좀 가봐 했을 때의 뤼앙 스는 교수가 학생을 가르치는 말투였다.
남동생은 아빠의 부재를 크게 느끼고 있었다. 엄마도 나도 그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지만 표현 방식이 항상 엇나가 있었다. 사춘기를 10년 동안이나 겪은 남동생은 기피의 대상이었다. 늘 날이 서있고 예민했으며 작은 한마디에 화를 분출해 냈다. 특히나 아빠가 없이 큰 것은 전부 엄마 탓이라는 강력한 신념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동생은 아빠가 의처증에 가정폭력을 휘둘렀으며, 조현병으로 입원하기까지의 사실을 본 적도 없으며 들은 적도 없다. 엄마가 자살시도를 한 사건은 더더욱이 모른다. 그러니까 나와는 전혀 다른 입장이었다.
남동생 입장에서 어찌 보면 조금 아파 보이는 아빠를 엄마가 매몰차게 집에서 쫓아낸 것이다. 그렇기에 각종 원망은 엄마를 향해있었고, 그것은 10년이란 세월을 힘들게 했다. 그동안에 엄마는 너무도 힘들어했다. 남동생이 안타깝고 안쓰러운 반면에 너무도 상처 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결국 성인이 돼서 남동생에게 아빠와 일어났던 일을 말해주었고 언제든지 만나러 가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남동생은 그 사실을 참으로 버거워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남동생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다. 남동생이 초등학교 때는 아빠에게 맞고 난 후 늘 약을 발라주고 진정시켜주었으며 고등학교 때는 매일 같이 전화를 했다. 남동생의 입장을 충분히 들어주고 할 수 있는 조언을 다했다. 핸드폰으 뜨거워져 저절로 꺼지는 상황도 일어났다. 보통 전화시간이 2, 3시간이 넘었는데 그 정도의 감정을 받아내면 남동생은 조금 진정을 한 듯했다.
몇 년이 지나고 대학교에 진학한 남동생은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혼자 살고 싶다며 강력한 주장을 했다. 이때도 엄마는 남동생의 요구를 바로 들어주었다. 원룸에 살고 있는 남동생에게 분기별로 찾아갔다. 아빠의 과거와 현실을 듣고는 많이 힘들어했기 때문이었다. 대학원 때 모아둔 돈으로 남동생의 자취방에 먹을 것을 채워 넣어주었다. 나는 이미 훨씬 오래전 집을 나와서 생활했으니 동생이 어떤 것이 필요한지 너무도 잘알 고 있었다. 그 돈이 내가 입고 싶은 옷, 먹고 싶은 것을 아껴서 자신에게 썼다는 것을 알까.
남동생은 위에 어른이 없었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위해주는 어른만 있었을 뿐 강력한 훈육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 때문에 자기보다 윗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엄마, 나, 여동생은 남동생의 문제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말투는 늘 가르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나 여동생과 연년생이기 때문에 특성이 두드러졌는데, 미술을 하는 여동생에게 '공부를 못하니까 붓칠이나 하지' 하는 말 등으로 상처주기 일쑤였다. 남동생은 집안에서 아빠가 없었기에 유일한 남자인 자신이 제일 우위에 있다는 착각과 함께 결핍이 공존했다. 그 모순이 부딪혀 만들어낸 최악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나에게도 정신과를 가보라는 내용 자체가 문제 되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남동생의 오만함이,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과를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고마움을 알지 못하는 우둔함이. 난 여전히 남동생에게 사과를 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엄마는 방관했다. '성인 돼서 너희 둘이 싸운 것이니 알아서 풀어라.' 엄마에게 말했다. '가족이라고 해서 잘 지내야 하는 법은 없다고. 그리고 일방적인 잘못이라고.나에게 선을 과하게 넘었으며,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보면 다행이라고.' 남동생에게 뭘 바랐던 것일까. 그동안 엄마 아빠 노릇을 대신해 주었던 나의 노력에 대한 대가를 바랐던 것일까. 그저 미안하다는 진심 어린 사과 한 마디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