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 2년 차, 갖은 업무로 일상이 바빴다. 그 무렵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뒤차가 핸드폰을 하다가 내차를 박았다. 덕분에 허리의 압박골절과 일자목이 되었다. 가해자는 나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합의를 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이번에 합의가 안되면 자기는 더 이상 보험에 가입할 수 없다고. 아니 대체 얼마나 사고를 많이 내면 보험에 가입까지 안될까.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한참 물리치료를 다니고 있을 때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퇴근하고 아픈 허리와 목을 붙들고 물리치료를 받으러 갔다.
저녁 7시쯤 물리치료가 끝나갈 때였다. 생생히 기억이 난다. 나이가 좀 있는 여성이 전화 와서 ㅇㅇㅇ씨 보호자 님, 빨리 병원에 와야겠다고 위독하다고. ㅇㅇㅇ씨는 아빠 이름이었다. 조금 지나서 여동생이 울면서 전화가 왔다. 언니 당장 가보라고. 그렇다. 아빠가 실려간 병원은 내가 취직을 한 지역에 있었다. 지금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 가족 중에 나밖에 없었다. 허리에 있는 전기치료 장치를 떼어달라고 급히 말했다.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을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아빠는 보이지 않았다. 나이가 든 한 여성분이 자신은 요양보호사라며 아빠의 핸드폰을 쥐어주고는 응급실 병상으로 나를 데려갔다. 아... 이를 어쩐다. 15년 만에 본 아빠는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알아볼 수가 없었다. 대체 그동안 어떻게 지내면 사람이 이렇게 될 수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온몸이 떨리고, 숨이 안 쉬어졌다. 그 자리를 박차고 병원 밖으로 나와 숨을 쉬려고 애를 썼다.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숨이 뒤로 먹어 들어갔다. 요양보호사라던 그녀는 내 옆에 와서 등을 쳐주고 놀랄 수 있다며, 자신은 가보겠다고 하고 가버렸다.
아빠는 혼수상태였다. 깨어나면 기적이고, 못 깨어나면 죽는 것이었다. 엄마와 여동생에게 전화가 계속 왔다. 괜찮냐고. 전화를 받고 말을 할 수 없었다. 놀란 엄마와 여동생은 지금 당장 가겠다고 했다. 둘이 오려면 적어도 2, 3시간은 걸리니. 혼자 병원에서 아빠의 상태를 지켜봐야 했다. 아빠는 한마디로 노숙자 같았다. 머리는 정돈이 되지 않아 한껏 길러져 있었고, 수염은 대체 언제 민건지 엉켜서 쇠수세미가 얹혀진 것 같았다. 게다가 피부는 시커먼 때며 먼지며 더덕더덕 붙어있는데 몇 개월은 방치되어 보였다. 옷은 어디서 난 건지 알 수 없는 거적때기 같았고, 몸은 너무나도 말라서 나뭇가지를 이어 붙인 인형 같았다. 이는 전부 다 빠져서 송곳니 근처 두 개 정도 남아있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아빠는 180의 훤칠한 키에 건장하고 잘생겼다. 우리랑 함께 살 때는 나이가 들었어도 정신과약을 먹고 있었어도 아빠는 그 동네에서 가장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나? 이럴 수가 있는 건가?
기차를 타고 엄마와 여동생이 각 지역에서 왔다. 그 당시 남동생은 군대를 가있었기에 연락을 하지 못했다. 엄마는 무척이나 담담했고, 여동생은 오열을 했다. 엄마와 여동생을 보고서야 안도감이 들었다. 동시에 죄책감과 두려움이 함께 엄습했다. 그날 엄마와 나, 여동생은 일반 병실이 날 때까지 응급실에서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놀랍게도 아빠는 그날 밤에 깨어났다. 눈동자는 열렸으나 움직이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아빠는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엄마와 여동생 나까지 모두 병가와 연차를 쓰고 아빠에게 매달렸다. 당장 간병인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물티슈로 아빠의 얼굴과 몸을 닦았고, 가위로아빠의 머리와 수염을 잘랐다. 정리를 하고 보니 아빠의 얼굴이 보였다. 엄마는 '이렇게 살 거면 먼저 가지, 왜 이런 꼴까지 보여. 그래도 닦고 잘라놓으니 사람 같네.' 엄마의 얼굴에서는 알 수 없는 분노와 안타까움이 공존했다. 아빠는 기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죽다가 살아난 아빠는 점차 엄마, 나, 여동생을 알아보았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을 복기하는 것이 힘들다. 속이 울렁거리고 그때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중학생 때 아빠의 모습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한 번씩 아빠는 내게 전화를 했는데, 그때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엄마와 남동생을 때린 것이 미운 것도 있었고, 내 삶에서 치부라고 생각하는 한 부분을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당시는 결혼을 준비하고 있을 때라 더욱더 아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다.
전화 오는 날은 정해져 있었다. 명절과 자신의 생일. 대학교 초반에는 전화를 받으면 '아빠 생일인데 전화도 안 하냐. 아빠 생일에 뭐 없냐' 등 기가 찬 말만 늘어놨다. 5살 이후로 생일 선물은 고사하고 축하를 받아본 적이 없는데 무슨 아빠 생일인가. 용돈 한 번을 못 받아봤다. 내가 어느 대학교에 입학했는지, 어떻게 지내는지는 궁금해하지도 않았으며 오롯이 자신의 생일만을 생각했다. 그런 아빠가 너무도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 뒤로는 아빠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15년 뒤 이렇게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미래를 알았다면, 아빠의 전화를 받아줄 걸 그랬다. 그래도 아빠가 스스로를 아빠라고 부르고, 내 이름을 부르고, 선물을 받고 싶다고 한 것은 정신이 온전할 때 가능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아빠는 아픈 사람이란 것을 내가 인지하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자신의 생일을 챙겨주지 않는 자식이 야속한 것은 아픈 아빠가 할 수 있는 감정 표현 중 하나였고 수화기를 든 것은 그렇게라도 목소리를 듣고 싶었던 최고의 행동이었다. 후회라는 것을 잘하지 않고 사는 내가 처음으로 아빠의 전화를 받지 않은 날들을 후회했다. 난 아빠가 이렇게도 빨리 망가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