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딸은 살림의 밑천이다. K-장녀 와 같은 말이 왜 생겼을까. 예로부터 전해진 말부터 최근에 생긴 말까지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즉, 대한민국의 첫째로 태어난 여자는 조금 피곤하게 산다는 방증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집들도 있겠지만 보편적으로, 일반론적인 이야기를 하면 그렇다.
난 어릴 적부터 엄마가 떠날까 봐 불안했던 마음이 항상 내재되어 어떠한 선택을 하던 엄마는 고려대상 1순위 었다. 늘 가지고 있던 마음은 '엄마가 힘들면 안 돼, 어떻게 하면 덜 피곤할까, 나만 참으면 돼, 내가 장녀니까 동생들을 책임져야 해.' 결고 가볍지만 않은 감정들이었다.
그렇기에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 엄마의 생일과 어버이날을 항상 챙겨 왔다. 물론 유치원에서 어버이날에 카네이션 만들기는 필수 프로그램이다. 때문에 한국의 어린이들은 유치원 때 빨간색 종이를 접에 펭귄가위로 끝을 둥글게 잘라 카네이션을 만드는 것이 자동으로 학습된다. 손재주가 많았던 나는 동생들과 종이뿐만이나 리 고무찰흙, 지점토, 아이클레이, 소묘등으로 다양한 카네이션을 제작해 왔다. 물론 남동생은 함께하긴 했지만 중간에 포기하는 일이 잦았다.
엄마의 생일은 굉장히 특별한 날이었다. 왜냐면 결혼기념일은 엄마에게 존재하지 않으니 자신의 생일이 큰 가족 행사 중에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 의중을 모를 리 없는 나는 이 또한 어릴 적부터 엄마의 생일을 알뜰히 챙겨 왔다. 친인척에게 용돈을 받으면 그것을 고이 모아놓았다가 문방구에 가 머리핀을 세트로 사고 생일카드를 골랐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돈을 벌기 시작하니 좀 더 큰 선물을 해줄 수 있었다. 취직을 해서는 매해 다른 맞춤형 케이크와 좋은 선물을 했다.
이외에 대학원 시절에도 취춘생 시절에도 비상금으로 모아둔 돈은 엄마를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썼다. 한 해는 전주 여행을 잡아 한옥 게스트하우스에서 자고, 맛난 전라도 음식 투어를 했다. 또 어떤 해는 제주도 여행을 가기 위해 여동생과 일정을 함께 잡아 운전하며 둘을 모시고 다닌 적이 있다. 갑자기 엄마는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정말 보고 싶은 전시가 한다고 했다. 하필 위치가 남해에 붙어있는 곳이라, 해운대역에서 내려서 택시도 한참 들어갔어야 했다.
이동수단 알아보기, 숙소 예약하기, 일자별 관광장소 루트 짜기, 점심 저녁 먹을 곳 서치하기, 사용 경비 계산 등을 모조리 혼자 했다. 남동생과는 여행을 다니지 않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었다. 난 어김없이 부산으로 가족여행을 계획하고 숙소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때 나는 이제 성인이 된 동생들에게 이제 너희들도 같이 찾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의 말은 공중에서 흩어졌다. 조금이라도 찾아보려고 한 것은 여동생뿐이었다. 남동생은 그저 누워서 그냥 가자고 하는 곳 갈게, 찾기 귀찮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그 부산여행은 내가 모조리 총대를 메고 성인 3명을 끌고 다니게 되었다.
그 뒤로는 남동생과 여행을 다니려고 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엄마는 아픈 손가락이 아들인지라 내가 계획한 모든 여행에 아들과 함께 가자고 이야기를 했다. 여동생이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처음 월급을 받아 경주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여동생은 경비를 대고 나와 함께 경주여행 루트를 짜는 일을 했다. 엄마는 처음에 굉장히 좋아했으나 숙소를 다 예약하고 나니 나중에 와서 하는 말은, 아들이 없이는 못 가겠다며 경주 여행을 취소하자고 했다. 여동생은 하루종일 울었다.
남동생은 즉흥적이고, 혼자 격한 여행을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혼자 훌쩍 강원도로 가거나 순천으로 국토대장정을 떠나 거나한 식이다. 그러니까 엄마를 모시고 다니는 여행은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나는 늘 엄마에게 아들은 여행 취향이 맞지 않아서 같이 다닐 수가 없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엄마는 어떻게든 아들과 함께하려고 딸 2명을 울린다. 경주여행은 못 가겠다는 사람이 아들 자취방을 보러 서울에는 가야겠다고 했다. 다 양보해서 그럼 아들도 볼 겸 서울 나들이로 가자고 했다. 결국 다 같이 서울에서 아쿠아리움을 구경하기로 했는데, 그마저도 아들은 동물학대라며 자신은 영화 약속이 있으니 다음에 보자고 훌쩍 떠났다. 엄마는 저녁에 아들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이뿐만 아니라 여러 일들이 있지만 각설한다. 어김없이 엄마의 생일이 찾아왔다. 나와 여동생은 시간을 맞춰 엄마 집으로 가기로 했다. 아들은 여자친구와 여행약속을 잡았다며 오지 않았다. 서운한 기색을 얼굴에서 감출 수가 없었으나 아들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기분을 조금이나도 좋게 해주고 싶었다. 근교로 저번에 가고 싶다고 했던 워터파크를 제안했다. 처음에는 살짝 당황해하더니 여동생도 좋다고 하자 흔쾌히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지 않고 여동생은 늦게 도착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근처 맛집 투어를 가자고 했고 여동생이 없으면 싫다고 했다.
결국 집에서 조촐한 저녁을 함께했다. 그래도 내가 사들고 간 와인을 한병 따서 여자 3 이서 홀짝홀짝 마셨다. 이제 각자 사회생활하느라 시간도 없고 맞추기가 어려우니 집에서 밥만 먹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나는 갑자기 울컥 올라왔다. 30여년 묵어있던 속마음이 올라왔다. 나도 지칠 대로 지쳤다.
"아니 왜 꼭 다 같이 시간을 맞춰서 함께 해야 되는 거야? 엄마한테 따로따로 효도를 하면 안 될까? 아들도 안 오는 마당에 그럼 해주고 싶은 자식이 오잖아. 그럼 좀 엄마도 받아야 되는 건 아닐까? 매번 전부 챙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그렇다고 동생들이 그 시간에 맞춰주지도 않고 각자 생각이 따로 있는데, 언제까지 내가 다 붙들고 해야 되는 거야? 그놈의 아들아들 거리지 말고, 서운하면 전화해서 티라도 내. 그리고 제발 이제는 각자 하자. 각자. 동생들도 이제 30이다 돼 가는 성인이야. 언제까지 가족가족 거리면서 엄마의 자식들을 내가 억지로 모아서 해야 되는 건데? 숨 좀 쉬자."
여동생은 울면서"언니가 좋아서 했던 일 아니야? 왜 이제 와서 그래"라고 했다.
엄마는 "네가 그렇게 하기 싫으면 하지마. 언제 누가 하라고 했어, 나는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을 거니까 내버려두어."
나는 도저히 이 감정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한참 울다가 물 한 컵 마시고, 집을 박차고 나왔다. 엄마에게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 비수처럼 꽂혀 그 자리에 견디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여태 좋아서 한 줄 알았다니, 너는 대학교도 나오고 사회생활도 해봤으면서 그 일들이 쉬운 것이 아니란 걸 왜 모르는 거지. 아빠 없이 사는 엄마가 너무 안타까워서. 다른 아줌마들이 남편이랑 여기저기 여행 다니고 좋은 것 먹고 보고 하는 게 부러울까 봐. 게다가 종종 내게도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 난 엄마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해준 건데.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을 거라고? 이렇게 비참할 수가 없었다. 나의 인생의 일부분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내가 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 산 거지.
어느 순간부터 원가족이 해체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각자 독립해 나간 지 10년이라는 세월이 넘어가고 있고,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너무도 다르게 고착화되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우리가 자식이기 때문에 한꺼번에 보고, 모두가 함께 무언가를 했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는 것도 안다. 그 모든 것을 감안하고도 여태까지 내가 해왔던 것은 나와 동생들을 버리고 떠나지 않고 키워준 엄마에게 은혜를 갚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나는 참 바로 같았다.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것이었구나. 이 모든 게 나의 착각이 불러온 헛된 시간들이었구나.
이제는 알고 있다 가족들의 문제가 아니고 나 스스로의 문제라는 것을. 결국 이렇게 된 것은 전부 나 때문이란 것을. 내가 가지는 가족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가족들에게는 오해와 착각을 일으키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긴 민하게 파악하지 못한 우둔함이 더해져 생기는 대환장 콜라보였구나. 아 내 탓이구나.
차라리 이렇게 된 것이 더 쉽다. 가족들의 문제였다면 다 고치기는 어려워도 나 혼자의 잘못이라면, 나만 고치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