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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진 Apr 24. 2022

누구나 아빠가 된다 : 책 <아빠의 아빠가 됐다>

나는 효자가 아니라 시민이다

 미혼인 채로 나이가 오십이 다 되다 보니, 생물학적 아빠의 가능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낮아지고 있다. 이번 생에서는 아무래도 힘들 듯. 반면 누군가에게 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혹은 의료적 차원에서 돌봄을 제공해 준다는 의미, 즉, 보호자로서의 아빠(혹은 엄마)의 가능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지는 듯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잘하느냐 못 하느냐의 차이일 뿐, 결국 사람들 대부분은 자식을 꼭 낳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엄마와 아빠가 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누군가가 꼭 혈육인 것도 아닐 테고.     

조기현, <아빠의 아빠가 됐다>

 삼십 대 때에는 지인의 결혼식과 돌잔치에 번번이 적잖은 돈과 주말 시간을 바쳤다. 그리고, 사십 이후로는 그 자리를 장례식이 대체하고 있다. 친구나 지인이 아닌 그들 부모님의 장례식 말이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친구나 지인은 희한하게도 평소에 알던 그들의 모습보다 훨씬 듬직하고 어른스러워 보인다.

 어쩌면 나이 든 부모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는 장례의 과정은 한 사람을 진짜 아빠나 엄마로 완성시켜주는 경험일지도 모르겠다. 돌봄은 고통스러웠을지라도 그들을 크고 깊은 통찰로 이끌어 준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을 테니 말이다.  

   

 내가 열네 살이던 여름, 아빠가 돌아가셨다. 아빠의 나이는 쉰 하나. 예고도 징후도 없던 무더운 여름날 아빠는 쓰러졌고 돌봄과 준비의 과정도 귀찮으셨나, 하룻밤 만에 훌쩍 건너가셨다.

 그때를 떠올리면 슬픈 기억보다 다 큰 어른들이 날것의 감정을 쏟아내던 장례식장의 후텁한 공기가 먼저 떠오른다. 아빠의 영정 사진을 들고 영구차에 올라타는 날 안타깝게 쳐다보던 시선들에 어쩔 줄 몰라 쭈뼛대던 내 모습도 겹쳐 생각나기도 하고.


 어쨌든 난 아빠가 되지도 못했고 아빠의 아빠가 될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난 어른이 된 친구들과 다르게 작고 위축됐으며 사람들은 젊은 남자의 죽음에 슬픔을 정제하지도 못했다.      


 낭만적인 생각을 했다. 내가 좀 더 어른이 된 후 아빠가 돌아가셨다면, 아빠의 보호자가 되어 아빠를 돌보다 천천히 작별했다면 죄책감은 줄어들고 추억은 좀 더 울창해지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어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지켜주는 일엔 많은 희생이 뒤따를 게 분명할 텐데도,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낭만화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장례식장에 중년의 상주(喪主)가 되어 두 번째 아빠의 임무까지 완수하는 친구들을 보고 있자면, 철없는 생각이 든다, 부러움이라는.     


 나이 들고 아픈 부모의 보호자가 된다는 건, 내가 그들보다 더 넓고 단단한 몸만 가지고 있다고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다 타버린 양초에 힘없이 박힌 바짝 마른 시커먼 심지 같은 부모의 몸뚱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기약 없는 돌봄을 지치지 않고 실천하는 일에는 어쩌면 몸보다 마음의 단단함이 더 필요한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이 돌봄과 함께 찾아오면 아무리 단단했던 보호자의 마음도 타내려 가는 양초마냥 흐물거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쓰러진 노부모를 돌본다는 것이 중년의 어른들에게도 이중 삼중의 고통을 가져다주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자신조차 돌봄이 아직 필요한 어린 청년에게 이런 책임이 닥치게 될 때의 아득함은 감히 상상조차 힘들다. ‘동행’과 같은 TV 프로에서 종종 보게 되는 소년 소녀 가장의 안타까운 사정에 공감하며 후원금을 보낸 적도 있지만 내가 그들이 겪고 있는 구체적인 일상의 장애물들을 하나하나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다고는 말하기 힘들 듯하다.

 그러다 조기현이라는 1992년생 청년 작가가 쓴 책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우연히 읽게 됐다.     


 이혼한 아빠와 특별한 친밀감 없이 살아가던 스무 살의 작가는 대학 갈 돈도 의지도 없지만 글쓰기와 영화, 그리고 춤에 관심이 많은 끼가 넘치는 청년이다. 이 스무 살의 청년에게 갑작스러운 시련이 찾아온다. 공사장에서 미장이로 일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알코홀릭 아빠가 의식을 잃고 문자 그대로 쓰러진 것이다. 한순간에 일반적인 청년의 삶은 지워진다. 지워진 자리 위로 보호자가 될 만한 어른임을 증명하고, 도움을 받을 만한 가난을 또 증명하는 낯선 삶이 그에게 찾아온다. 작가는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아빠를 들쳐업고 9년의 삶을 살아낸다. 그리고 기억하고 기록한다. 9년의 기간 동안 그가 겪은 고난과 부조리, 그리고 통찰과 연대를.     


<p.8 : 뭐라도 해보려던 스무 살에 아버지가 쓰러졌다...... 그 뒤 1인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다시 일을 나가지 못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술에 취해 있었다...... 알코올성 치매 초기에 진입했다....... 어느새 2인분의 삶을 담당하는 ‘가장’이 됐다. 돈, 일, 질병, 돌봄이 자주 나를 압도하거나 초과했다...... 외로움과 고립감이 뒤따랐다.>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작가는 아빠를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기지 못한다. 단지 스물네 살이 되지 않아 (병원비를 꼭 완납할 거라는) ‘연대보증인’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힘겹게 연대보증인을 구해 입원은 시켰지만 작가는 두 번째 장벽인 돈과 마주한다. 아빠는 빠르게 회복됐고 퇴원을 위해서는 병원비를 마련해야 한다. 작가가 가난한 만큼 친척들도 모두 가난해 손 벌릴 곳이 없다. 어쩔 수 없이 국가기관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행정 편의주의의 불합리라는 허들을 뛰어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기대해 볼 만한 곳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하지만 이곳은 행정 편의주의보다 더 잔인한 구구한 가난의 증명을 요구한다.      


<p.41 : 불쌍한 존재가 돼야 하고, 불쌍한데 착해야 하고, 그래서 지원이 더 의미 있어야 한다. 내 삶 전체를 가난으로 설명하고, 그 삶을 심사받아야 한다...... 차라리 서류 뒤에 숨어서 가난을 증명하는 쪽이 더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가난하기 때문에, 이런 절차들 속에서 길을 헤매는 모욕은 마땅히 감수해야 했다.>     


 작가는 결국 보증금 2,000만 원에 월세 35만 원으로 살던 집에서 월세를 올리고 보증금 1,000만 원을 주인에게서 돌려받아 병원비를 충당한다. 이후로도 작가의 아빠는 치매와 화상 등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돌봄은 온전히 작가 혼자의 몫이었고 자신의 꿈과 일을 놓고 싶지 않은 청년은 좌절하고 분노하며 결국 낙담한다


<p.109 : 아빠가 죽으면 형벌이 끝나고 해방되는 걸까? 고생시키느니 차라리 잘 갔다는 위로라도 받아야 할까? 아빠의 죽음을 말끔히 도려내고 해방감을 만끽할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작가는 다시 아빠의 아빠로서의 자신의 삶에 용기를 주고 연대를 위해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성장한다. 그리고 효자나 아빠의 아빠가 아닌 한 명의 건강한 시민과 또 한 명의 도움이 필요한 시민의 관계 맺음 속에서 자신을 다시 호명한다. 동시에, 전근대적인 가족주의가 아닌 좀 더 빈틈없고 가난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나이대와 상관없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사회적 돌봄의 시스템을 우리에게 역설한다, 꽉 차고 단단한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p. 169 : 아버지와 나는 부모와 자식이 아니라 시민과 시민으로 관계 맺으려 한다. 내가 아버지를 돌보는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가 사회적이고 신체적인 약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내가 가족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족 관계 증명서’가 있듯이, 아버지와 나의 돌봄 기간을 증명하는 ‘시민 관계 증명서’가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어리고 가난해서 그가 통과한 9 년의 시간이 더 짠하고 공감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 나이와 성별, 지역과 계층에 상관없이 혼자서 짊어진 돌봄은 불완전하고 상처일 것이다. 그렇기에 돌봄이 상처가 되지 않고 시민 대 시민으로 모두가 돌봄의 네트워크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소외당하거나 부당한 처우를 받는 구성원이 없었으면 한다. 이를 위해 더 빠르고 신속히 사회적 돌봄이 정착되고 뿌리내리기를 빌어본다.

     

 글을 마치면서 쓰러진 노부모를 돌봤을 장례식장의 많은 친구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효자, 효녀라고 불리며 짊어졌을 돌봄의 무게는 그들에게 어떤 감정적 불씨를 남겨 뒀을까. 유독 축 처져 있던 어느 친구의 어깨가 혹시, 먹고 사느라 충분히 돌봐드리지 못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 때문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런 미안한 맘으로 사흘 낮밤 문상객을 받고 절을 했을 친구를 생각하면 추억이니 부러움이니 같은 단어를 쓴 내가 다시 한번 철없게 느껴진다.     


 지금 난, 아빠의 아빠는 겪어 보지 못했지만 엄마의 아빠가 될 준비를 하는 중이다. 아직은 돌봄을 드리기보다 받고 있는 기분이지만 곧 엄마가 나를 아빠로 호명하는 날, 책 속 작가의 깨달음처럼 무거움보단 당연함으로 시민의 덕목을 실천해 봐야겠다. 그리고 당당히 돌봄의 연대를 요구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쓰다 : 김호연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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