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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진 May 08. 2022

1987 : 아빠와 곰보빵

뒤늦게 쓰는 애도 일기

 중학교 2학년이던 1987년은 많은 것을 바꿔 놓은 해였어. 최루탄과 화염병의 거리가 바꿔 놓은 거대한 것들에 대한 얘기는 아냐. 그건 옛날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면 될 고, 난 곰보빵과 냉보리차가 바꿔 놓은 사소(私少)한 것들에 대해 말해볼까 해.




 아빠가 경비 일을 시작하신 건 1985년, 그러니까 식구들이 고향인 전남 보성에서 모두 서울로 이사해 온 두 해 전부터였을 거야. 쉰 살도 되시기 전이었지. 요즘은 ‘드문 나이’도 아닌 고희(古稀)에 들어선 분들이나 하는 게 경비 일이지만 그땐 그렇지도 않았나 봐. 뭘 만들던 공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빠는 인천에 있는 한 제조 공장의 야간 경비 일을 이년 가깝게 하고 계셨어. 아빠는 낮이 아닌 한밤, 공장의 불이 다 꺼지면 그제야 쓸모가 생기는 노동자가 되어 돈을 버셨던 거지. 낮의 사람들이 썰물처럼 한꺼번에 빠져나간 텅 빈 공장 건물 곳곳을 플래시와 함께 둘러보시던 아빠의 뒷모습은 좀 고단하고 쓸쓸해 보였을까? CCTV도 흔치 않았을 때니, 공장 주변을 돌고 또 돌려면 지치지 않을 굳센 다리가 필요했을 거야. 그렇담 사십 대 남자가 경비 일을 한다 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는 시절이긴 했네.


 아빠는 보통 토요일 오후에 집에 오신 뒤 하룻밤을 주무시고 일요일 오후나 저녁에 공장으로 돌아가셨어. 부모님 사이에 오가는 다정한 대화를 전에도 딱히 본 적은 없지만, 서울로 가족들이 이사를 온 후엔 더더욱 그랬지. 아빠가 계신 주말 동안 오가는 두 분의 대화는 늘 너무 차갑거나 뜨거울 뿐, 귀 기울이고 싶어지는 온기를 찾긴 힘들었어. 돈 때문이었을까? 대학생 큰아들과 중고등학생인 막내 누나와 나까지 합쳐 세 명에게 들어가는 학비나 생활비가 만만찮았을 거야. 벌이는 시원찮고 나갈 돈은 많은 팍팍한 살림살이와 다정함은 여간해서 어울리긴 힘들긴 해. 어쨌든 부모님의 말다툼은 마치 주말의 명화처럼 매주 잊지 않고 찾아오는 고약한 불청객이었어.     

 달동네에 있던 우리 집은 작은 방을 겨우 두 개 품고 있던 낡은 단독주택이었는데 방 하나는 대학생이던 형의 차지였어. 그리고 그나마 좀 더 큰 다른 방에서 직장을 다니던 누나와 고등학생 누나 그리고 엄마와 나 이렇게 넷이 함께 잠을 잤지. 넷이면 뭐, 그나마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는 잘 수 있었는데 문제는 아빠가 오시는 토요일 밤이었어. 다섯이 다닥다닥 붙어 서로의 마른 어깨를 느끼며 누워 불 꺼진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대체로 엄마가 먼저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하셨어.

 ‘시장 바닥에서 그 구박 천대를 받음시로 리어카 이리 끌고 저리 끌고 댕겨 봤자 다 헛짓거리여. 애들이 굶든 돈 없어서 학교를 못가든 애비가 돼서 걱정은 눈곱만치도 안 하는디......’     

 이런 푸념과 자책으로 위장한 아빠의 무능력과 무심함에 대한 강력한 비난에 아빠는 대체로 몇 마디 응수하다 백기를 들고 토요일 밤의 배틀을 종료하셨지.

 ‘아따, 시끄럽네. 엥간히 좀 하소. 그만 자세, 자!’     

  이렇게 (대체로 아빠 쪽인) 한 명이 링 위로 수건을 던지듯 이불을 낚아채며 가로눕기 전까지는, 엄마와 아빠의 말다툼을 삼 남매는 매주 라이브로 들어야 했어. 뜨겁다가 차가워지고 자책하다 울어버리는 이 버라이어티한 말다툼을 강제 직관했던 토요일 밤의 그 열기와 냉기가 징글징글하게 싫었어. 내 방 하나만 있다면 진짜 소원이 없겠다,라고 속으로 숱하게 되뇌며 까무룩 잠이 들었지.     


 적어도 내가 아는 아빠는 자식들에게 대놓고 정을 주거나 가르치는 스타일은 아니셨어. 약간 츤데레 같은 분이셨지. 예전 아버지들이 대체로 그렇긴 하지만 막둥이인 나한테도 큰 뒤로는 잘했다, 예쁘다 같은 닭살 멘트는 단연코 날리지 않으셨지. 그래도 내가 좀 더 어렸던 초등학생 시절엔 늘 아빠가 꼭 안아줘야 잠이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나긴 해.

 그랬었나 싶을 정도로 가깝던 부자 사이도 서울로 식구들이 이사를 오고 내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빠르게 이차 성징을 겪고 나서부터는 서먹서먹해지고 말았어. 아, 딱 한 번, 서울로 올라온 뒤 아빠랑 동네 목욕탕에 간 적이 있긴 했어. 그냥 등만 열심히 밀어 드렸지 뭐. 기억엔 없지만, 설마 바나나 우유 정도는 사주셨겠지?     



 그해 늦봄이나 초여름쯤의 어느 토요일부터였을 거야. 집으로 들어서시는 아빠 손에 제과점 빵이 담긴 큰 종이봉투나 비닐봉지가 들려 있기 시작한 게 말이야. 그리고는 그다음 주에도, 그 다다음 주까지도 쭉 변함없이 아빠는 제과점 빵을 들고 오셨어. 열 개도 넘는 생전 못 먹어본 빵들이 봉지 안에 소복이 담겨 있는 걸 봤을 때의 그 첫 흥분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소보로빵이라고들 하는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오돌토돌 못생긴 곰보빵이 대부분이긴 했어도 운수 좋은 날이면 단팥빵이나 초코가 들어 있는 소라빵 아니면 생크림빵도 꽤 섞여 있었지. 빌려 돈은 못 받고 이자로 빵을 받아 오시는 건가, 하고 처음엔 의심도 했지. 그런데 알고 보니 간식으로 야간근무하는 경비들에게 회사에서 나눠주는 빵을 안 드시고 모아 가져오시는 거였더라고. 그럼, 그 전엔 왜 안 가져오셨던 거지? 진즉 집에 좀 가지고 오셨으면 황홀감이 혀끝을 감싸고도는 초코와 생크림의 강림을 좀 더 일찍 영접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지. 이유는 지금도 몰라. 왜 아빠는 딱 그 시점부터 곰보빵을 챙겨 가지고 오셨던 건지. 딱히 누구한테 물어보기도 뭣해서 삼십 년 넘게 가끔 궁금해할 뿐이지.


 물증은 없고, 심증만 가득할 뿐이지만, 그냥 아빤 왠지 알고 계셨던 거 같아. 아빠가 그해 여름을 넘기지 못하실 거란 걸. 자식들이 눈에 밟히고 안타까웠던 걸까? 심지어 그즈음에 이러저러한 자식들 걱정과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담아서 형한테 편지까지 쓰셨어. 낮술을 잔뜩 잡수시고 술김에 한도를 초과한 감상에 젖어 휘갈겨 쓰셨다기엔 한 문장 한 문장에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지. 유언장이 될 걸 마치 알고 쓰신 것처럼 말이야. 나에겐 ‘사람’을 좀 좋아해 보라는 팁을 남겨 주셨어. 그 팁대로 삼십 년이 넘게 사람을 좋아해 보도록 노력하고 산 게 지금 이 꼬락서니라 죄송스럽긴 하지만 아빠의 눈에도 장가도 못 가고 빌빌대며 살 막둥이가 눈에 밟히시긴 했나 봐.




 그날은, 여름의 중심으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7월의 일요일이었어. 서둘러 여름을 각오하지 않은 많은 이들에겐 어이없을 정도로 맵고 뜨거운 날이었을 거야. 그해 여름은 어느 거리에서나 대기에 맵고 알싸한 최루 가스 냄새가 조금씩 배어 있긴 했어. 노동자들에게 6.29 선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거든. 파업과 집회, 화염병과 최루탄은 서울의 거리 곳곳에 오브제처럼 1987년의 여름을 완성해주고 있었지.


 아빠는 늘 그렇듯 토요일 하루를 식구들과 보내고 일요일 오후에 집을 나서셨어. 공장으로 바로 가지 않고 중화동 작은집에 제사가 있다고 거기서 하루 주무신다고 하셨지. 아빠는 출발 전에 다소 뜬금없는 제안을 나한테 하셨어.

 ‘니도 방학했으니까 아빠랑 같이 작은집에 가자!’

 친척 집에 가서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덕담을 듣는 일 같은 건 적어도 사람을 싫어하지는 않는 형의 몫이라고 늘 생각했던 나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단호하게 말했어.

 ‘싫어!’

 ‘싫어!’가 생전 아빠에게 건넨 내 마지막 말로 남을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다정하고 신중하게 거절할 걸 그랬나 봐. ‘아버님의 사려 깊은 제안은 감사하오나 안타깝게도 저는 금일 매우 바쁠 예정이어서...’쯤이면 아빠한테 덜 미안했을까? ‘싫어!’는 마지막 인사가 되기엔 너무 정 떨어지는 말이잖아. 후회막심이야.      

 집 안의 장손이었던 아빠는 작은집의 제사도 꼬박꼬박 챙기셔 와서 중화동의 골목은 낯선 곳이 아니었을 거야. 서울로 이사 온 지도 이년이 넘어갔으니 아빠가 그날 오후 중화동의 골목에서 길을 잃고 헤매셨단 얘기는 말이 안 되는 거지만,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어.


 한낮 온도가 30도가 넘는 땡볕 아래서 아빠는 길을 잃고 헤매시다 목이 말라 가게에서 냉보리차를 한잔 사 드셨어. 팔십 년대엔 더운 여름날 오십 원이나 백 원쯤을 받고 골목 가게에서 ‘히야시’가 잘 된 냉보리차를 팔기도 했거든. 아빠에게 냉보리차를 판 가게를 탓하고 싶진 않지만 그날 아빠가 마신 냉보리차는 위생적으로 문제가 있었나 봐. 힘겹게 길을 찾아 작은집에 도착한 아빠는 제사 시간인 자정이 되기 전에 심각한 식중독 증세를 보이셨대. 토사곽란이 멎지 않았고 급기야 의식까지 가물가물해지셨다네. 작은집 식구들은 놀라서 급히 근처 대형 병원 응급실로 아빠를 이송하고 엄마한테 급히 전화했을 거야.      

 아빠가 아프시단 얘기를 막내 누나한테 듣긴 했지만, 얼마나 심각한 건지, 그래서 내가 어떤 감정과 표정을 취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어. 뭔가 부산스럽지만 낮은 목소리로 두런거리는 형과 누나들의 얘기를 엿들어 봤지만,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듣지를 못하겠더라고. 월요일 밤이 되니, 막내 누나마저 병원으로 가고 집에 혼자 남게 됐지. 신기한 게, 혼자 집안에 남겨진 채 보낸 그날 밤에 대한 기억이 하얗게 지워져 있어. 무슨 생각을 하며 잠들었는지, 두렵진 않았는지, 슬플 예정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신나게 혼자 너른 방을 독차지하고 늦게까지 텔레비전을 실컷 보다 잠들었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나.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아침이 밝았어. 불볕의 어제와는 다를 거라 분명히 해두려는 듯 날은 시작과 함께 다시 어둡고 눅눅해졌지. 그리고 내처 거칠고 불친절한 비마저 쏟아지기 시작했어. 나만 도려낸 채, 식구들은 당연함의 자리를 벗어나, 낯선 병원에 모여 있었어. 아침나절, 작은 돌산 비탈 위에 위태로이 세워진 가건물 공동 화장실을 향해 폭우를 뚫고 뛰어가다 내가 우연히 본 게 있어.

 아이들의 한글 공부용으로 만들어진, 손바닥 크기의 코팅이 된 낱말 종이 몇 장. 그것들이 어울리지 않는 자리인, 집과 공동 화장실 사이 흙길 위에 흩어져 있었던 거야. 종이 위에 쓰인 글자는 ‘아빠’, ‘괜찮다'와 같은 말이었어. 기억의 왜곡을 인정한다 해도, ‘아빠, 아버지, 좋다, 좋으시다, 괜찮다, 괜찮아 ' 등의 의미망에 걸리는 말들이었던 건 똑똑히 기억해. 근데, 웃기게도 그 종이들을 보고도 진짜 아빠가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진 않았어. 오히려, 이 상황을 다 잘 알고 있는 어떤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가 건네는 마땅찮은 위로처럼 보였을 뿐이었지. 그저 일어날 일들에 대한 불길한 암시처럼 느껴질 뿐이었으니까.


 점심 무렵 사촌 누나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고, 떨리는 목소리로 누나는 내게 말했어.

 ‘555번 타고 청량리 ** 병원으로 당장 와!’

 난 닳고 해진 운동화를 재빨리 꿰어 신고, 달동네의 좁고 경사진 골목을 우산도 안 쓰고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뛰어 내려갔어. 누나가 일러준 대로 정류장에서 555번 버스를 탔어. 내릴 곳을 놓칠까 긴장하며 난 온몸으로 빗물을 뚝뚝 버스 통로에 흘리고 서 있었어. 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그렇게 버스 창밖만 바라보면서 말이지.


 아빠는 내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숨을 거두셨어. 나중에 아빠의 사인이 패혈증이란 얘길 들었어. 의사가 손 써볼 겨를도 없이, 성격도 급하시지, 이틀도 안 돼 돌아가신 거라고. 난 울어야 해서 울어보려 무지 애를 쓴 거 같아. 그런데도 눈물은 생각만큼 잘 안 나왔어. 입관식 땐 군데군데 보라색 피멍이 든 아빠의 기능을 상실한 몸뚱이를 보고도 눈물보단 낯설고 두려운 생각만 들었어. 관속으로 옮겨지던 ‘그것’은 분명 아빠가 아니니까, 그렇다면 아빠는 어디에 있는 걸까, 같은 생각들로 그냥 어리둥절해하고만 있었지. 그러다 식구들이 울면 따라 울고, 따라 절하고 또 시키는 대로 알 수 없고 복잡한 장례 절차에 열심히 동참하긴 했던 것 같아.


 하지만 삼 일간 끊임없이 이어진 곡소리, 기도와 찬송가 소리 그리고 코끝을 알싸하게 찔러 오던 국화꽃 향은 결국 어리숙한 열네 살 막둥이마저 아빠의 죽음을 이해보다 앞서 인정하게 만들어 놓았어. 마치 죽음의 증거들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마르지 않을 잉크통을 뒤집어쓴 것처럼 간단없이 내 온몸을 타고 흐르던 시간이었다고 할게. 어린 내게 아빠의 삼일장은 상실된 것에 대한 알 수 없는 애도와 이해가 빠진 인정을 강요당한 폭력의 시간에 다름 아니었어. 충분히 치러내고 들여다보지 못한 상실과 애도에 대한 이자는 해가 지날수록 복리처럼 불어나 날 시시때때로 압박해 들어 올 예정이었지만, 그 경황에 누가 그런 걸 알려줄 수 있었겠어. 각자의 자리에서 이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도 다들 벅차고 바빴을 테니 말이야.


 뜨거웠던 일요일, 폭풍 전야 같던 월요일, 그리고 장대비의 화요일을 지나자 거짓말처럼 맑게 갠 목요일이 다행히 찾아왔어. 그리고 그날 낯선 파주 어느 곳에 아빠를 묻어 두고 다들 말없이 달동네 우리집으로 돌아왔지. 혼자서 마저 울 골방도 없어 우린 그냥 그렇게 밥을 다시 지어먹고 학교로 시장으로 사무실로 흩어졌을 거야. 애도, 그거 지금은 사치니까 좀만 미뤄두자고, 그러기로 했어,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아빠가 돌아가시고 삼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액체괴물처럼 흐물흐물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가 불쑥 날 방문하곤 했어. 꿈 속이기도 했고 군대에서 무장공비를 잡겠다고 판초우의를 뒤집어쓰고 앉아 있던 참호 안이기도 했고, ‘넌 참 이상한 사람’이라는 결별의 말 뒤에 질질 끌려오기도 했지. 아슬아슬 딱 필요할 정도로만 다 큰 소년의 삶을 다채롭게 망쳐줘 왔다고 말하면 너무 비겁한 몰아주기인가?     

 결국 나도 오십을 코앞에 두게 됐네. 아빠가 겨우 발만 담근 오십 대를 잘 살아가고 싶은데 방법을 아직도 모르고 있어. ‘지천명’쯤 되면 이제 차분하고 냉철하게 곰보빵과 냉보리차에 대해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쓰고 보니 아직도 과잉이고 과몰입인 것 같기도 해. 요즘 오십은 그냥 늙은 소년일 뿐 어른이 되려면 또 한참 남았을 텐데, 죽기 전에 우린 어른이 되긴 하는 걸까? 그래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부끄러워하지도, 자책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온전히 직면하는 그런 날이 올까? 모르겠네. 뭐 그래도 어쨌든 이렇게 한번 털어내고 나니 훨씬 맘이 편한 것 같기는 해.     


 그래서 말인데, 이제 아빠가 살아보지 못한 오십 이후의 날들은 아빠의 죽음에 대한 후일담이 아닌 ‘내’ 이야기로 좀 더 채워 넣을 수 있으면 좋겠어. 그게 아빠의 바람이기도 할 테고, 그러다 보면 조금은 더 어른스러워지고 한 꺼풀 벗겨낸 진짜 내 모습이 슬슬 보이기 시작할 것도 같은데.     


 ‘아빠, 곰보빵 진짜 잘 먹었어! 그리고 거리의 냉보리차는 내가 싹 다 치워버렸어! 그리고 다음에 또 아빠 이야기를 쓸 일이 생기면 그때는 좀 더 밝고 즐거운 얘기로 골라볼게. 기대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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