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지저분한 얘기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한 달 전쯤부터 엉덩이 부위가 붓더니 점점 딱딱해져서 아프고 불편해졌다. 이주쯤 견디며 나아지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나아질 기미는 없었고 심해지는 쪽으로 몸은 제 갈 길을 갔다. 결국 항문외과에서 진찰을 받았다. 고름이 차서 아픈 거고 일단 약을 먹으면서 지켜보자고 의사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그리고 몸의 면역력이 잘 작동하면 알아서 천천히 나을 수도 있단 희망적인 말도 덧붙이셨다.
또 이주가 흘렀고 몸은 낫는 듯 앞으로 나아가다 나은 상태에서 두세 배쯤은 뒤로 후퇴하며 더 악화된 채 나를 압박해 들어왔다. 앉아 있어도 서 있어도 극도로 불편했고 잠들어야 끝나는 매일매일의 사투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여기서 포기하면 결국 대수술(?)만이 해결 방법일 텐데 신성불가침 영역이라도 되는 듯, 몸에 칼을 대선 안된다는 오기가 내 속에서 발동하고 있었다.
사실 살면서 입원을 한다거나 크든 작든 수술을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특별히 건강한 몸이라고 생각하진 않으니 어쨌든 이건 운이 좋은 쪽에 가까운 것이라 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난 고집과 오기를 부렸다. 내 몸과 의지를 가진 또다른 내가 머리를 맞대고 기싸움이라도 하듯 서로 양보할 맘이 없어 보였다. 이건 좀 과장해보자면 마치 세기의 대결처럼, 혹은 거대한 종교적 질문에 대한 탐구처럼 의도치 않게 내 앞에 우뚝 서버렸다. 의지가 우리들 영혼의 영역이라면 영혼은 그것이 머무는 집인 몸이라는 물리적 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걸까? 맘먹은 대로, 상상하는 대로 세상도 내 모습도 바꿔나갈 수 있다고 여기저기서 비밀(secret)처럼 속삭여 대던 말들의 진위가 내 엉덩이 고름을 두고 드디어 낱낱이 밝혀지게 되는 걸까?
쓸데없이 심오(?)해졌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의 의지나 간절함의 영롱한 열매는 그렇게 쉽고 뻔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니 다만 내 영혼이 다소 나약하고 겁이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화학무기를 들고 나온 듯 몸이 이미지와 감각으로 공포를 뿌려대자 내 온 정신은 불안에 먼저 휩싸였고 심리전에서도 흔들려 질투와 부러움이 스멀스멀 똬리를 틀었다. 엉덩이를 잘도 풀썩풀썩 버스나 지하철 의자에 깔고 뭉개는 사람들이 부러워 미치겠고 과거의 나도 저들 중 하나였단 사실이 전생의 일인 것처럼 아득해지며 절망에 빠졌다.
한마디로 내 의지 혹은 영혼의 단단함과 면역력은 모두 기준 미달인 걸로 명백하게 밝혀졌고 공포와 부러움과 통증은 임계점을 넘어섰다. 그리고 결국 난 수술을 받기로 결정했다. 장장 한 달 간의 미련한 대치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수술한 지 사오일이 좀 지났다. 의사 선생님은 성공적,이라고 하시지만 내 엉덩이 통증은 뭐가 아쉬운지 아직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다행인 건 수술 전만큼 아프진 않고 천천히 좋아질 거란 희망이 불안과 공포를 압도하고 있단 사실이다.
아파도 혹은 아파서 좋았던 게 혹시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수술이나 입원만 해보지 않았지 물집에서 발가락 골절, 베드벅에서 감기몸살까지 수도 없이 다양한 이유로 아파봤고, 아파서 좋은 건 나은 뒤에 찾아오는 감정과 말들 속에만 존재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예를 들어, 편하게 걸을 수 있어 좋구나, 목이 아프지 않아 좋구나, 엉덩이를 모두 붙이고 앉아서 좋구나,와 같은 말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작은 깨달음 하나 정도는 이번 수술을 통해 얻게 돼 특별히 더 좋았다. 그건 바로 내가 아플 수 있는 곳은 생각보다 다양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몸의 부위가 밀리미터 단위, 아니 그보다 더 작은 단위로 분절돼 아플 준비를 하고 있단 사실이다. 그리고 분명 내가 던져준 에너지원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내 통제를 벗어난 채 유기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내 몸을 마치 미지의 생태계라도 되는 듯 호기심을 갖고 관찰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제 스스로 작동하고 어디서든 탈이 날 준비가 된 채 돌진하고 있는 몸의 일방성에, 그 사특한 진격을 멈추라고 엄숙하고 진지하게 선언하는 내 모양새는 처량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이미 일어날 결과를 두고 난 의지니 영혼의 압도적 강건함이니 따위로 연주가 다 끝난 악보 위에서 혼자 진지하게 교향곡을 짓겠다고 장엄한 척 음표를 긋고 있었던 꼴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과 의지는 아무런 힘이 없단 말인가. 유전과 음식으로 작동하는 레일 위에 몸을 싣고 정차하는 역마다 올라타는 질병과 고난을 그저 묵묵히, 그리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우리의 태도만 죽어라 교정하는 일밖에 할 수 있는 게 정말 없는 것일까. 그게 결국 진실이라면 참으로 암울하고 절망스럽다.
하지만 또 인간의 종특이란 게 다행스럽게도(?) 어떤 상황에서도, 죽음의 수용소에서조차도 희망을 찾아 수혈받을 준비를 하는 것이란 걸 난 또 알고 있다. 거기에 망각이라는 엄청난 마취제가 고통의 기억을 마비시킬 준비 중이란 것도. 그렇기에, 그럼에도 우린 살아갈 수 있고, 순간의 기쁨들에 취해 블링블링한 삶을 꿈꾸게도 될 것이다. 그건 참 좋은 것이다.
난 키아누리브스(Keanu Reeves)가 연기한 매트릭스(Matrix)의 네오(Neo)가 진실과 자유, 세상의 구원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빨간 알약 대신 파란 알약을 선택했어도 그것대로 매트릭스는 좋은 영화였을 거란 생각이 든다. 우리는 우리 몸의 운명에 대해 실질적으로 할 수 있고 바꿀 수 있는 일이 크지 않단 걸 알더라도 저마다 작은 희망을 품으며 많은 일들을 결심한다. 유기농 제품을 먹고 비건(vegan)이 되기로 결심하며 또 하루에 십 킬로미터씩 매일 뛰며 어떻게든, 뭐라도좋아질 거라고 주문을 건다. 그리하며 마침내 서서히 망각이란 마취제 가스 자욱한 속에서 매트릭스 속 삶의 순간순간을 영원처럼 오롯이 향유할 수도 있게 된다. 어찌 됐건 충실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면 개가 물어뜯은 진실 위로 또다른 진실이 찾아들 거라 믿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각자의 삶에 진실이 꼭 하나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카멜레온처럼, 박쥐처럼 지조도 없이 변색하고 변절하더라도 무슨 상관인가. 내게 필요한 진실을 찾았다면 그걸로 또 된 거 아닐까.
그리하여 난 오늘도 믿는다. 쭉 엉덩, 이 편한 세상은 이어지고 달콤한 인생도 가끔씩 달달하게 찾아들 것이라고. 모든 순간이 빛나고 영원할 필요 없이 나만의 빛깔과 독특한 모양새로 즐거운 인생이 분명, 기필코 찾아올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