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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진 Jul 17. 2022

여행의 기술

D - 47

 D-47. 다시 비행기에 몸을 싣고 이국의 먼 곳으로 떠나기까지 남은 날 수이다.  삼 년 만이다. 오랜만에 비행기 탈 일을 생각하니 설렘만큼이나 스무 시간 가까운 비행시간을 어떻게 견디나 하는 걱정도 크다. 나이 탓인가.

 그럼에도 여행의 목적과 행선지를 생각하는 순간, 천천히 팔다리를 거쳐 가슴으로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전류와도 같은 설렘과 흥분감은 이십 대 때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과거 어떤 여행과도 분명 같지 않을 새로운 여행이, 마치 새로운 생명체 하나가 탄생하듯 흥분과 설렘의 자장 위에서 싹을 틔우기 시작하면, 난 움직인다. 그것도 부지런히, 열심히 몸을 움직인다. 그리고 그 여행의 싹은 쑥쑥 여행 준비를 하나씩 클리어할 때마다 몰라보게 자라난다.

 

 항공권과 호텔 예약을 마치고 필요한 여행 서류까지 내처 구비하고 나면 마지막, 기다림이라는 시간의 단비가 어느새 탱탱해진 줄기 위로 간단없이 축복처럼 쏟아져 내린다. 그렇게 점점 D데이에 붙은 숫자가 0에 가까워지다 보면, 난 여행이 가져다주는 환희의 순간을 문득 목도한다. 그것은 화려하고 빛나는 꽃이다. 매번 새롭게 태어나는 여행이라는 생명체가 설렘과 기다림으로 화려하게 빚어낸 여행의 꽃, 말이다. 꽃이란 늘 기다림 속에서 천천히 그 봉오리를 터뜨리는 것이니, 여행의 꽃도 그러하다.


 여행엔 또 뭐가 또 있을까. 설렘이 가져다주는 화려한 꽃 말고 쓰고 단 열매들은 내게 없었을까. 고유하고 다양한 여행이 날 거쳐가는 동안 가르쳐준 여행의 기술은 또 없었을까.




스물다섯, 첫 해외여행

 복학생이던 1998년의 봄. IMF의 여파로 환율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모아놓은 돈도 많지 않아, 소위 남들 다 가는해외 어학연수의 옵션이 내게서 속절없이 사라져 갔다. 즈음, 나와 비슷한 처지의 대학생들 사이에 어학연수의 대안으로 이스라엘의 키부츠(kibbutz)-일종의 농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공동체-라는 곳에 대한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비행기 삯과 약간의 경비만 있으면 키부츠에서 잡다한 일을 해주고 용돈과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 포인트는 영어로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과 소통하며 다양한 문화체험을 한다는 것이었다. 문화체험이란, , 이스라엘과 인접국가를 여행하는 것 정도가 되겠다.


 

 같은 해 4월 초 난 비자를 발급받고, 오리엔테이션을 거쳐 이스라엘에 도착했다. 성경에도 등장하는 갈릴리 호수(Sea of Galilee) 근처의 키부츠로 배정을 받았고, 이후 두 곳을 더 거쳐 키부츠 생활을 난 마무리했다. 생각보다 형편없는 용돈과 인종차별을 겪으며 인생의 쓴맛과 더 쓴맛을 맛봤지만 여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돈과 키부츠에서 다달이 받아 모아둔 용돈을 가지고 난 호기롭게 혼자 육로 국경을 통과해 이집트로 여행을 떠났다. 좋은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 멋진 풍광과 낯선 거리, 시원(始原)으로 향한 압도적인 유적들이 짧은 시간 동안 나를 여행이 주는 기쁨과 좌절에 흠뻑 취하게 하고 다시 돌아갈 시간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갔던 스물다섯 살의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배낭을 싸며 잔뜩 우울해 있었다.


  1998년 여름, 카이로(Cairo). 허름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짐을 싸다 말고 베드벅에 물린 팔을 들여다보면서, 삐걱거리며 날개가 돌 때마다 먼지가 한 움큼씩 떨어져 내리는 천정의 낡은 팬을 올려다보면서 세계여행을 다짐했다. 서른이 되기 전, 아직 청춘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때 다시 이 쾌쾌해서, 간지러워서, 다리가 아파와서 불편한 배낭여행의 끝을 보리라고.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어야만 짐을 싸는 순간 밀려오던 깊은 우울감을 떨쳐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스물다섯의 나, 시간은 넘쳐났으나 돈이 부족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짠내 나는 스스로가 너무 싫었다.




서른하나, 365일간의 배낭여행

 첫 직장, 그리고 또 한 번의 직장을 거쳐 근거 없이 청춘의 마지막이라 여겼던 서른에서 일 년을 더 지나 서른 하나에 도착했다. 세계 여행을 매 순간 맘속에 담고 살아갔을 리는 없지만, 어쩌다 보니 다짐했던 시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때에 난 다시 배낭을 꾸리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미완성이었던 스물 다섯 내 첫 배낭여행의 완성을 위해 난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멀리까지, 그곳이 세상 끝이라면 그곳까지 가볼 생각이었다.  

 끝을 보지 못한 것들에 미련을 두면, 알다시피 우린 기필코 실패하게 되어 있다. 끝을 보지 못하고 미숙했던 것이, 그 순간 우리에겐 완성이었고 이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세들이 우리를 늘 불안하게 하고 심지어 불행하게 만든다. 그걸 다시 배낭을 꾸리며 들떠 있던 서른하나의 나에게 가르쳐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다시 낯선 거리와 골목을 기웃거렸고, 이곳에서 닿지 못한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갔다. 자주 불편했고 때때로 행복했으며 크게 웃고 숨어서 울었다. 파키스탄의 훈자(Hunza)에서 함께 길 위를 헤매고 다녔던 친구들이 물어 왔다. 더 가보는 건 어떻겠냐고. 왼쪽으로 왼쪽으로 한 번 더 가보자고. 미련이 남지 않게 갈 수 있을 데까지 가보자고, 그리고 돌아오자고 부추겼다.

 난 머뭇거렸다. 스물다섯의 카이로 때와는 다르게 내겐 시간이 두려웠다. 더 먼 곳으로 일 년을 더 떠돈다면, 돌아왔을 때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이곳에서 정상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시간이 기다려줄까. 편입되어 누구나의 삶을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박탈되는 것은 아닐까, 난 몹시 두려웠다.


 결국 난 계속 가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자리를 알아보고,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리고 잊을만하면 나만 떨어져 돌아서던 그날에 대한 미련과 자책이 당연하게도 내 뒤를 밟아왔다.  스토커처럼 집요하게 밖에서 나를 불러대 조롱하고 유했다.

 딜 수 없을 때마다 잠깐씩 다시  위로 나섰다. 그리고 나가야만,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그날의 결정이 다시 수긍됐고 일상을 껴안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십 년 이상이 필요했다. ‘이 혹은 '완성'이 있을 거라고 믿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미숙한 생각인지, 또 그 미숙한 것을 비난하지 않고 견뎌내는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아는데 말이다.


 화려하고 분명한 여행의 꽃은 매번 여행의 시작에서 우리를 맞이하지만, 여행이 가져다주는 열매는 한 번에 찾아오지 않는다. 모든 순간과 경험에 대한 존중과 감사라는 그 열매는 삶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숱한 시행착오와 실패를 껴안은 후에야 그 존재를 우린 인식하게 되는 것 같다. 아주 천천히.



 

여행의 기술 

 그렇다면 여행에도 기술이 필요한 것일까, 궁금해진다. 기술이 애써서 배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정하게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적어도 내게 그런 것은 여행엔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여행의 위대함과 참혹함을 온전히 느끼고 다시 또 용감하게 길 위에 나서는 것 외에는 말이다. 부질없지만 여행에 대해, 굳이 그 특별함에 대해 말해야 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들의 밖은 끝이 없고, 발견에는 예측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걸었던, 혹은 걸어야 하는 길들에 더 특별하고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


 그럴 수만 있다면 떠나고 여행하고 돌아오는 이번 여행의 모든 순간이 평등하게 뻤으면 좋겠다. 하지만 혹시 그렇지 못한다 해도, 미리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힘든 여행이었을지라도 적어도 돌아오는 그 순간만큼은 행복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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