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동안 딱 이틀 쉬었습니다.
여가가 필요한 이유.
대학시절 활동했던 재무 동아리에는 OB 세션이라는 게 있었다. 소위 잘 나가는(?) 선배의 무용담을 듣는 자리인데, 하루는 투자은행(IB)에서 기업 인수합병(M&A) 업무를 하는 선배의 세션이 열렸다. 투자은행은 당시 동아리 친구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장이었다. 게다가 투자은행의 꽃이라고 불리는 기업 인수합병 부서에서 근무하는 선배라니. 그래서인지 재학생들 뿐만 아니라 졸업한 선배들까지 자리하며 세션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한 시간 가량의 세션이 끝난 후, 선배는 뒤풀이에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두둑한 지원금을 남긴 채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당시 우리 눈에는 그 선배가 귀여운 여인(Pretty Woman)의 리처드 기어보다 멋지게 보였다. 그 선배가 남긴 말이 기억난다. "지난 5년 동안 딱 이틀 쉬었습니다. 그나마 일하다 쓰러져서 강제로 쉬게 되었습니다."
허핑턴 포스트의 창립자 아리아나 허핑턴은 어느 날 광대뼈가 부러져 책상 아래 쓰러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당시 창업 2년 차이던 허핑턴 포스트는 빠르게 성장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미디어 중 하나로 발돋움하였다. 타임지에서는 그녀를 '세계 100대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완벽하게 성공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매일 18시간씩 일하다가.(허핑턴은 이 사건을 겪은 후 하루 8시간 수면 루틴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직 오래 일하는 것을 성공의 훈장인 양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다. 바쁜 일상에 소진되어 가는 자신을 반짝이는 훈장으로 위로하며 애써 모른 척한다. 성공은 원래 이런 거라고 스스로에게 되뇐다. 잠시의 여유를 즐길 새도 없이, 바쁘다는 불평을 늘어놓는 친구들과 스스로를 비교한다. 뒤쳐지고 있는 것 같다.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까지 든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토록 멋진 휴식'의 저자 존 피치와 맥스 피렌젤에 따르면, 애초에 인류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고 한다.
수렵채집민들은 배가 고프면 사냥을 하러 나갔다. 사람은 많지 않은데 자연이 주는 먹거리는 풍성하다. 몇 시간만 들이면 3일 치 정도의 식량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 날이 어둑해지면 잠자리에 든다. 해가 뜨면 일어난다. 이들에게는 아직 일의 개념이 없다. 남는 시간에는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러다가 신석기 혁명이 일어난다. 한 곳에 정착하게 된다. 이젠 먹이를 구하러 다니는 대신 농사를 짓는다. 남은 곡식은 저장한다. 내 창고는 반이나 비어 있는데, 나보다 더 열심히 일한 친구의 창고는 가득 차 있다. 부의 개념이 생겨난다. 내년에는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수렵채집 시절보다 일거리가 늘었지만, 현대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이들은 아직 한량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난다. 발 빠르게 움직인 덕에 자본가가 되었다. 일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노동자들이 내 공장에서 일한다. 여가를 즐기던 중, 문득 노동자들이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진다. 늦은 시간까지 술이나 마시며 빈둥거리는 것 같다. 다음 날 공장일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지 걱정이 된다. 마침, 막스 베버라는 사람이 '프로테스탄트 직업윤리'라는 말을 만들어 낸다. 우리 인간은 노동을 통해 신의 과업을 완수할 수 있단다. 이젠 일하는 것은 선한 것이고, 일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이 되었다. 공장 노동자들에게 신의 이름으로 더 열심히 일하라고 독려한다. 일은 이렇게 고귀한 것이 되었다.
수요가 공급을 앞서는 공급자 중심의 사회가 지속된다. 만드는대로 날개 돋친 듯 팔린다. 공장의 규모가 커진다. 어느덧 기업가가 되어있다.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한 엘리트들을 고용한다. 이들은 올바른 결론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올바르다'라는 것은 '정답이 있다'는 것이다. '정답이 있다'는 것은 '결국 모두 같은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모두 같은 해법을 내놓게 된다. 하지만 문제없다. 별다른 거 없이도 만들면 팔리는 사회가 유지되고 있으니까. 차별화가 필요 없는 사회에서는 더 많이 일하는 것이 곧 성공이다.
세상은 변했다. 풍요로워졌다. 이젠 색다른 무언가가 없으면 팔리지 않는다. 이성보다는 창의성이다. 논리보다는 직감이다. 하지만 우리는 변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오래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며 부자들의 시간을 창의적인 시간으로 바꿔주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누르며 고귀한 것이 여가에서 일로 바뀌었지만, 창의성의 대가들은 여전히 여가를 즐겼다. 좋은 휴식 뒤에는 도약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수학자이자 이론 물리학자인 앙리 푸앵카레는 아침, 저녁으로 두 시간씩, 하루 네 시간만 일하고도 수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베토벤과 차이코프스키는 하루에 몇 시간씩이나 산책을 했다. 아인슈타인은 때때로 쪽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사색을 즐겼다.
오래전 사람들이니까 가능했던 거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시대를 이끌어 가는 대가들은 여전히 본인만의 시간을 확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영국 유명 음악 프로듀서 겸 싱어송라이터인 에드 우디 앨런은 분주한 런던을 떠나 핀란드의 한 오두막에 있는 사우나에서 시간을 보내며 2주 만에 앨범을 완성했다. NBA 슈퍼스타 르브론 제임스는 수면의 질과 양을 매일 체크하며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고 한다. 미국 유명 그래픽 디자이너인 스테판 사그마이스터는 7년에 한 번씩 1년 간의 안식휴가를 갖는다고 한다. 이렇듯 창의력은 의도적인 쉼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인공지능은 무서운 속도로 발달하고 있다. 우리가 정해진 틀(혹은 규칙) 안의 업무에서 인공지능을 이기기는 어렵다. 이세돌 씨도 패배하지 않았는가? 머지않아, 엘리트들만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날카로운 이성과 논리적 사고력에 의지한 업무들도 점차 인공지능에게 넘겨주게 될 것이다. 아무리 오래 일해도 안된다. 365일, 24시간 일하는 인공지능을 당해내기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창의력이다. 창의력을 갖춘 이에게 인공지능은 경쟁자가 아닌 조력자로 다가온다. 인간의 창의력과 인공지능의 분석력이 조화를 이루며 사회의 생산성이 큰 폭으로 향상된다. 사람들은 적게 일해도 된다. 다수가 일하고 극소수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사회에서 모두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사회로 회귀한다. 이쯤 되면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다.
'여가'에 해당하는 고대 그리스어는 스쿨의 어원인 '스콜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가 세운 페리파토스 학파가 있는 리케이온에서 논리, 형이상학, 수학, 생물학,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한 사색과 토론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지식노동이라 불릴만한, 이런 활동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여가였다. 일과 여가는 '무슨 활동인가'가 아닌, '왜 하는가'에 따라 구분되었던 것이다. 실용적인 목표와 목적이 있으면 일, 순전히 그 자체를 위해 목적이 아닌 의미를 찾으면 여가. 이런 식이었다. 일필휘지(一筆揮之)를 꿈꾸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쉼표는 반드시 필요하다. 잠을 충분히 자든. 산속에 가서 고독과 성찰을 즐기든.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든.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잠시 일을 잊을 수 있는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