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너그러움

한의원이 스타트업이라고?

by 날큐

옛사람들은 한 사람의 인물됨을 네 글자로 평했다고 한다. 공문십철(孔門十哲)* 중 하나인 자공은 스승 공자를 온량공검(溫良恭儉)**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최고의 지도자로 일컬어지는 세종의 인물평은 어떠할까? 태종 이방원은 아들 세종을 관홍장중(寬弘莊重)***이라 평했다고 한다. 네 글자 중 첫머리에 있는 관(寬)은 흔히 너그럽다고 해석되나, 태종처럼 용의주도한 사람이 왕이 될 아들을 필부의 너그러움으로 평했을 리 없다. 공(公)의 영역, 즉 일과 관련해서 평했을 것이다. 세종은 리더로서 너그러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리더의 너그러움은 무엇일까? 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 재능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한다. 실례로 세종은 출신이 천한 장영실을 천문과 기기 제작에 능한 재주 한 가지를 보고 높게 쓰기도 하였다.



한 가지 능력만을 요구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잘하는 사람에게는 또 다른 것을 요구하게 된다. 얼마 전 같이 일하고 있는 실장의 반복되는 실수에 화를 낸 적이 있다. 실장은 숫자에 약한 사람이다. 삼국지로 치면 장비와 같은 사람이다. 목표가 있으면 일단 돌격한다. 애초에 실장의 그런 면을 높이 사서 채용하기도 하였다. 그런 실장에게 숫자를 다루는 꼼꼼함까지 기대한 것이다. 장비를 데려다가 제갈량처럼 쓰려고 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논어등반학교 졸업장만으로는 아직 부족한가 보다.(선생님 죄송합니다.)







우리 한의원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딜레마에 빠져있다. 애초에 예견된 문제였다.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노력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꽤 과격한 시도도 해봤다. 스타트업 정신으로 개원한 우리이지만, 이 문제만은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이 부분은 아주 중요하다. 한의원이라는 자영업이 확장된 형태의 사업으로 가는 초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스스로에 대한 너그러움(寬)을 저버려야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마저 든다.



문제는 이렇다. 우리의 타깃은 30~40대 여자들이다. 인구통계적으로 나누면 아마 한의원과 가장 친하지 않은 부류일 것이다. 이들을 한의원과 친하게 만들어야 한다. 여자들의 삶의 질을 뚝뚝 떨어뜨리는 부분들도 개선할 수 있다고 알려야 한다. 한의학이 효과적이라고 설득해야 한다. 엘리트주의는 싫어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소중한 고객(?)들은 한의원에서 이런 치료를 하는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가장 손쉽게 알리는 방법은 방송이다. 하지만 아내는 햇빛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땡볕에 서 듯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한다. 한의원에서 환자 중 한 분이 출연하는 프로그램 촬영을 한 적이 있다. 오랫동안 내원하신 분의 부탁이라 거절하기 어려워 촬영에는 임했지만, 목소리와 약간의 뒷모습만 비치는 것이 아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세종대왕도 한 사람에게는 한 가지 재주만 바랬다고 하지 않았나.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바로 글쓰기이다. 2017년 첫 글 이후 올린 글이 고작(?) 50여 개 이지만, 아내의 브런치는 구독자가 3,800명이나 된다. 처음 출간하는 책은 2쇄도 어렵다는 것이 업계의 정설이지만 아내의 책은 벌써 4쇄를 찍었다. 그것도 판매부수가 많지 않은 건강분야에서 이룬 성과이다. 팟캐스트도 계획하고 있다. 꽤 괜찮은 기획도 몇 개 있다.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환자들 대부분은 대표원장을 보고 한의원에 내원한다. 특히 우리 한의원은 그렇다. 아내와의 긴 상담을 하고 나면(정말 길다. 운영팀에서 싫어한다.) 대부분 환자들은 달과궁 프로젝트의 일원이 된 듯, '요즘 여자들의 삶의 질을 높이자.'는 우리의 사명을 전파한다. 그러다 보니 아내의 비중은 점차 높아져만 가고 있다.



작은 규모의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은 공감하겠지만, 초반에는 무조건 살아남는 것이 1순위 목표이다. 못 버티면 거창한 비전이나 목표는 한낱 허상에 불과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내의 두 가지 역할을 위한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실력 있는 부원장들이 여럿 되지만 환자들은 여전히 대표원장에게 치료받기를 원한다. 예전에는 진료를 3일로 줄이는 파격적인 시도도 해봤지만 작년 말부터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며 큰 리스크를 안고 가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글쓰기가 창작 활동이라는 특성도 무시하기 어렵다. 모든 일은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있다. 글쓰기의 인풋은 한량 같은 생활에서 나온다. 아내의 주장으로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산책을 가고, 여행을 가서 멍도 좀 때려야 글이 써진다고 한다. 어느 정도 공감이 되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글쓰기는 시험공부하듯이 쪽 시간을 활용하기도 수월하지 않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조선시대의 관직명은 명료했다. 참의(參議), 참판(參判), 판서(判書)라는 관직은 지금으로 치면 차관보, 차관, 장관쯤 될 것이다. 차관이라는 명칭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장관 보다 낮은 자리구나’하는 정도이다. 하지만 조선시대는 달랐다. 관직의 명칭에 그 포지션의 역할이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었다. 참의는 의견을 내는데 참여할 수 있는 자리이고 참판은 판단을 내리는데 참여하는 자리였다. 판서는 판단해서 서명해야 하는 자리였다. 똑똑한 네이밍은 업무의 혼선을 줄일 수 있었다. 각자 관직이 정한 범위 내에서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일을 하고 책임을 지면 됐던 것이다.



이제 리더의 너그러움(?)을 보일 때가 된 듯하다. 아내에게 한 가지 역할을 주어야 한다. 창업가는 슈퍼맨이 돼야 한다지만, 잘하는 것 한 가지에 집중할 때 최상의 결과가 나오는 것은 분명하다. 어쩔 수 없이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하더라도 슬로우모션 멀티태스킹****을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스타트업은 실패에서 제대로 배워야 한다. 스타트업 정신으로 무장한 우리가 배움이 없는 실패를 지속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제 배운 것을 실천해야겠다.




* 공문십철(孔門十哲) :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10명

** 온량공검(溫良恭儉) : 온화하고 반듯하고 공손하고 검소함 (직역)

*** 관홍장중(寬弘莊重) : 관(寬)이란 신하 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 재능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홍(弘)은 마음 씀이 넓고 크다는 뜻이며, 장(莊)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장엄하다는 뜻이고, 중(重)은 그 내면이 묵직하다는 뜻

**** 슬로우모션 멀티태스킹 :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경제학 콘서트]의 저자 팀 하포드가 주창한 이론으로 TED 강연에서 여러 가지 일을 일정 주기(몇 시간, 몇 일, 몇 주)를 두고 번갈아 하면 한 가지에 오랫동안 집중하는 것보다 창의적일 수 있다고 주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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