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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즈킴 May 29. 2019

결혼하기 좋은 때

준비된 결혼은 가능할까?

며칠 전 대학시절 알고 지내던 두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우연찮게 어떤 수업의 조모임을 통해 만나게 됐는데 그 수업은 정작 우리 세 사람의 전공과는 관계없는 일종의 교양수업 같은 거였다. 경영학을 전공한 A는 그 시절부터 늘 아이디어가 넘쳤고 졸업 후 결국 자신의 광고회사를 차렸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교내 중앙동아리에서 연극을 하던 B는 오랜 방황 끝 한 제조업 회사의 인사팀에 둥지를 텄다. 한때는 소설가가, 또 어떤 때에는 음악인이, 그러다 언론인이 되고 싶었던 나는 결국 여기저기 글을 연재하며 홍보일을 하고 있다.


종종 연락은 했지만 셋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오랜만이었다. 마지막 만남이 4~5년 전이었을까. 20대 후반에는 취직에 대한 고민과 사회초년생의 애환(?)이 대화의 주된 주제였다면, 며칠 전 그 술자리에서는 회사 내 중간관리자로서의 고충과 이제 막 회사를 차린 A의 고군분투가 주를 이뤘다. 연애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었다. 어느덧 30대 중반, 우리 모두 결혼에 대한 생각은 있지만 안타깝게도 누구 하나 현실적으로 이를 계획하지는 못하는 상태였다.


 나 하나도 건사하기 벅찬데 결혼은 무리야! 


먼저 나는 남자친구와 만난 지 어느덧 2년이 되었지만 결혼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애인의 국적이 다르다는 것도 비교적 보수적인 집안을 설득해야 하는 하나의 큰 산이었고, 무엇보다 현재로서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룰 ‘기반’이 없다는 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B는 얼마 전 선자리를 통해 소위 일등 신붓감이라는 ‘학교 선생님’과 결혼을 전제로 데이트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학교가 경기도에 있는지라 주말부부를 감수해야 할 가능성이 걸림돌이라고 했다. 1년 전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자신의 회사를 차린 A에게는 현재 결혼보다 회사를 안정적으로 꾸려나가는 것이 우선순위인 듯했다.


이미 친구의 절반은 자기 짝을 찾아 가정을 꾸렸고 이제 “결혼 안 하느냐”는 주변의 잔소리는 커져만 간다. 이른바 ‘결혼의 압박’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대한민국에 사는 일반적인 미혼 여성이라면 20대 후반부터 그 폭격을 맞을 수밖에 없다. 직접 경험해본 바로 이 결혼의 압박이란 취업의 그것과 맞먹는 보통의 스트레스가 아니다. 그렇기에 남보다 뒤처지기 싫어서 혹은 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는 이도 나는 몇몇 보았다. 그렇다고 그들의 행복을 감히 논할 수는 없다. 그 결혼 생활이 어찌 되었건 이는 삶의 주인공인 당사자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결혼도 때가 있다”며 이제껏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는 우리들을 한심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결혼은 언제 해야 하는 것일까? 앞으로 몇 년 간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그 없는 기반이라는 게 쉽게 생길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면 나는 평생 결혼을 할 수 없는 것인가? 이미 결혼을 한 친구들 대다수는 “다시 돌아간다면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혼을 만류하는데 확신 없는 결혼으로 인해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그래도 어떤 선택이든 후회가 따를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이라는데 그렇다면 남들 다 하는 결혼 나도 한 번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 따위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혼에 대한 생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곤 한다.  


결혼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지인 중 하나는 “결혼은 현실이니 안정적이고 경제력 있는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재정적 어려움이 없다면 인생은 덜 고단하겠지만 그것이 행복한 결혼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많은 주변의 많은 사례에서 목격했다. 누군가는 “준비되어서 결혼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일단 그 사람이 좋으면 하고 보는거야” 하고 호기롭게 결혼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날 밤 술자리를 파하고 왠지 착잡한 마음이 들어 칼린 지브란의 책 『예언자』의 한 페이지를 펼쳤다. 평소 교훈서나 자기계발서라면 질색을 할 정도로 싫어하지만 성서와 같은 이 책은 오래도록 상처 받은 마음을 위로했다. 저자의 메시지 하나하나가 먼지 같은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문득 슬퍼지거나 마음이 어지러울 때 이 책을 가장 먼저 찾곤 한다. 


20세기 예언자로 불리는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은 1900년대 초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활동한 레바논의 대표적인 작가다. 탄압 받는 이민자의 후손이었지만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예술가로 성장한다.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아랍어로 씌어졌는데 당시 그가 쓴 희곡은 아랍권역에 널리 알려져 ‘지브라니즘(Gibranism)’이라는 용어가 생길 정도였다고. 


20세 즈음부터는 영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예언자』다. 지브란은 이 작품을 통해 사랑, 결혼, 자녀, 일, 먹고 마시는 것, 기쁨과 슬픔, 죽음 등 인생의 근본을 이루는 스물여섯 가지 질문에 대해 문답 형식으로 답한다. 아래는 그의 잠언 가운데 ‘결혼에 관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그대들 부부는 함께 태어나 평생을 함께 보낼 것입니다. 새하얀 죽음의 날개가 그대들의 세월을 흩어지게 할 때까지 함께할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하는 순간에도 서로 거리를 두고 하늘의 바람이 그대 둘 사이에서 춤추게 하십시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십시오. 허나 사랑의 서약은 맺지 말기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기뻐하되 서로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십시오. 마치 기타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에 함께 떨릴지라도 서로 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서로 마음을 주되 서로의 마음을 가지려 하지 마십시오. 생명의 손길만이 그대들의 마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함께 서 있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마십시오. 사원의 기둥이 서로 떨어져 있듯이, 참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도 서로의 그늘 아래서는 자라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는 결혼이야말로 서로를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결혼이란 경제력, 주말부부, 커리어 등과 같은 현실적 문제를 차치하고 결국 함께 있더라도 스스로 설 수 있을 때, 상대방에게 의지하지만 의존하지 않을 수 있을 때, 상대방의 자유를 보장하며 신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과연 나는 하나의 주체로서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의 고민은 너무 공상적으로 흘러가버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결혼을 논할 때 정작 스스로가 아닌 바깥에서 해답을 구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현실적인 문제만 고려하기에 결혼은 인생에서 너무도 중요한 문제이기에 내 마음이 들여다보일 때까지 수없이 돌이켜봐야 하지 않을까. 지금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과 내 자신 스스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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