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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즈킴 Apr 16. 2019

순결상의 기억

30대에게도 성교육은 필요해

학창 시절 내가 겪었던 가장 어리둥절한 사건 중 하나는 ‘순결상’을 받은 일이다. 고등학교 3학년, 한국청소년순결운동본부라는 곳에서 각 지역 고교 학년 대표에게 순결상이라는 정체불명의 상을 수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학생회장도 아니었고 순결을 지키고자 하는 어떤 특별한 운동을 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얼떨결에 학교를 대표하는 순결상 수상자가 됐다.  


시상은 전교생이 모이는 조회시간의 말미에 이뤄졌는데, 단상 위에 오른 나는 수백 명의 친구들과 후배들을 대표해 가슴에 손을 얹고 순결 선서를 외쳤다. 그때 나는 순결운동이나 순결상의 정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음에도 단상 위에 서서 그 상을 받고 있는 내 모습이 적잖이 어색하고 또 우스운지라 나도 모르게 키득거리고 말았다. 앞에 서 있던 교장 선생님은 검은 뿔테 안경 사이로 진지하지 못한 나를 나무라듯  흘겨보다가 이내 못마땅한 얼굴로 상장을 건넸다. 그날 내가 상장과 함께 부상으로 받은 것은 다름 아닌 ‘은장도'였다.


이후 알게 된 사실은 내 또래의 많은 여성들이 은장도가 딸린 순결상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공교육의 현장에서 성교육을 가장한 순결 강요를 당해 본 경험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사단법인 한국청소년순결운동본부에서는 1998년부터 2016년까지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순결캔디와 순결책받침 등을 나눠주며 순결 교육을 진행한 바 있다. 당시 순결캔디의 겉봉투에는 ‘이 캔디는 우리 사회에 깊이 확산되어 가고 있는 각종 퇴폐요소와 유해환경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고 순결한 학생상을 정립하며 미래의 이상 가정 및 사회와 국가를 이루기 위해 만든 순결다짐용 캔디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참고 : 『생리고충회: 생리하는 사람들의 수다기록물』 22페이지)

순결캔디

청소년은 반드시 순결을 지켜야 하기에 피임과 같은 실질적인 성 지식에 관해서는 알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까. 서글프게도 나의 학창 시절을 돌아봤을 때 공식적인 성교육 시간에도 순결을 권유당하는 것 외에는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했다. 기껏해야 아기가 생기는 과정 따위를 보여주는, 해외 제작 비디오테이프를 틀어놓는 정도랄까. 교실의 누구도 구실처럼 띄워진 영상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고 성과 관련된 어떤 진지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났지만 오늘날에도 교육 현장의 성교육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적어도 순결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청소년의 성 자유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입에 담기 어려운 금기의 영역이다. 1년에 15시간 교육 당국에서 정한 학교 성교육 의무 시간마저 성폭력 근절 및 예방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어 심도 깊은 성교육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질병관리본부가 발표하는 10대들의 첫 성관계 연령은 해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지만 피임법에 대한 교육과 도구에 대한 접근성은 여전히 차단되어 성경험이 있는 청소년 10명 중 1명이 임신을 경험하고, 임신을 경험한 청소년 10명 중 7명이 낙태를 선택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고교 시절의 ‘순결상 수상’은 그 후 각종 대화나 술자리에서 단순한 조롱거리나 농담처럼 여겨져 왔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구시대적 산물의 하나로서 말이다. 하지만 당시의 비상식적 순결 교육은 고향집 책장 한 귀퉁이에 먼지 쌓인 채 꽂혀 있을 순결상 상장처럼 나의 정신과 마음속에 남아, 20대를 거쳐 30대 여성이 된 오늘의 나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러스트레이션 : 황하초


‘순결한 존재’가 되기를 거부하는 동시에 순결함의 가치를 저버리지 못하는 이중적 상황에 놓여있다고 해야 할까. 섹스를 즐거움의 대상으로 보는 동시에 어떤 고귀한 행위로 인지하는 아이러니. 피임의 중요성을 알고 있지만 편의점이나 마트에 가서 당당하게 콘돔을 사지 못하는 부끄러움. 이성에게 매력적인 존재가 되고 싶지만 성적 대상으로는 남고 싶지 않은 위선적 태도. 적정한 성교육의 부재는 성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과 두려움에서 나아가 성을 바라보는 이중성을 낳았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여전히 나의 몸과 성의 영역은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다. 30대의 나에게도 아직 성교육이 필요하다. 성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에게 주어진 자유를 보다 책임감 있게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에 대한 깊은 이해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 청소년 시기부터 먼저 성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고 토론할 수 있었다면 나는 조금 더 현재의 나를 사랑하고 내게 주어진 자유를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 고교 시절의 순결상이 마냥 우스꽝스럽게만 여겨지지 않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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