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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즈킴 Aug 26. 2019

그가 폭탄머리를 하고 나타났다

나다움을 잃지 않기 위하여

“악~~~~ 너 머리 뭐야!!”


그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6개월 만에 만난 H는 홍대 한복판에 엄청난 헤어스타일을 한 채 서 있었다. 마치 18년 전, 그러니까 우리가 17살 여고생 시절이었던 그 때처럼.


H는 말 그대로 ‘독특한’ 아이였다. 17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하얀 피부, 이른 바 폭탄머리를 한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겼다. 안경 너머로 무심한 듯 반 친구들을 바라보는 그는 선뜻 먼저 다가가기에는 어려운 캐릭터임이 분명했다.


얼마 안 가 H와 나를 비롯한 다섯 명의 친구들은 학교에서 제일 친한 무리가 되었지만, 그 중 하나는 처음 H를 봤을 때 “무서워서 일부러 피해 다녔다”고 고백해 배꼽을 잡고 웃은 적도 있다.


겉보기에는 반항심 가득한 모습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H가 비행을 한다거나 수업을 빠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저 자기만의 세계가 무척이나 뚜렷해 보통의 아이들과는 조금 달라보였던 것 같다. 특히 ‘자기표현’ 욕구가 강했던 그는 교복이나 두발 규정 등을 강요하는 학교의 억압된 시스템 속에서 누구보다 자유로운 머리 스타일로 ‘나다움’을 표출했다. 그는 다름 아닌 ‘호일펌(머리카락을 조금씩 알루미늄 호일로 싼 후 하는 펌)’을 통해 자신만의 폭탄 스타일을 연출했는데, 심지어 미용실에서 머리를 한 것도 아닌지라 펌이 제멋대로일 때도 있었지만 그조차 H를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결국 그는 눈에 띈다는 이유만으로 선생님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는데, 질타 속에서도 H는 폭탄머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머리가 밭고랑이냐”며 지청구를 하는 선생님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가발을 쓰고 다녔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보라색 브릿지가 들어간 가발을 착용해 더 혼이 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미대에 진학했다. 그때까지도 H는 고등학교 때보다는 조금 정돈되긴 했지만 특유의 폭탄머리를 유지하며 자신의 색깔을 드러냈다. 호일펌 스타일이 지겨워질 무렵에는 막상 자신의 새로운 스타일을 찾지 못한 것인지, 혹은 캡모자가 좋아진 것인지 한동안 모자를 쓰고 다녔다. 365일 어디서든 모자를 쓰고 다니던 그에게 우리는 모자 좀 벗으라는 말을 습관처럼 해댔지만 H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1~2년 이어지던 그의 캡모자 스타일은 놀랍게도 10년 가까이 이어졌다.

 

일러스트레이션 : 황하초 


그런 그가 모자를 벗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한 너무도 펑키한 헤어스타일로! 그의 새로운 스타일은 얼핏 레게머리처럼 보였지만 그는 ‘아프로펌(afro perm, 철사 등을 이용해 부시시한 펑키스타일을 만드는 펌)’이란 걸 했다고 했다. 최근 래퍼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이긴 하지만 사실 일상에서 아프로펌을 한 이를 보기란 드물다. 나의 호들갑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근황 이야기를 꺼내는 H를 보니 나는 문득 우리가 17살의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H는 사실 치앙마이에 가서 잠시 살다 올 생각으로 펌을 했다고 했다. 1년 전 “여기서는 더 이상 스스로 발전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회사를 그만 둔 그는, 그간 말은 안 했지만 이사 문제로 골머리를 썩었다고 했다. 마땅한 수익이 없는 상황에서 모아 둔 돈만으로 적당한 전셋집을 구하기에 서울의 집값은 너무도 비쌌다. 전월세 조건을 저울질하며 몇 차례 이사를 다니던 그는 이렇게 집을 구할 수 없다면, 차라리 집값이 싸다는 치앙마이에 가서 몇 달 살다오려 했다는 것이다. 그의 아프로펌은 그곳에서 헤어스타일을 신경 쓰지 않고 간편하게 살기 위한 수단이었다.
  

몇 군데 면접을 볼 일이 생기면서 결국 그의 치앙마이행은 무산됐지만 H는 한동안 폭탄 스타일을 유지할 거라고 했다. 심지어 며칠 전 부모님의 주선으로 나간 맞선 자리에도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휘날리고 돌아왔다는 것. 맞선녀가 이렇게 힙한 모습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텐데, 개성 넘치는 H의 모습을 보고 적잖이 당황했을 맞선남의 표정을 떠올리니 웃음이 났다.


무엇보다 면접이건 맞선 자리이건 정해진 규율에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표현하는 그의 자유로움이 느껴져 어쩐지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억압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고교 시절, 헤어스타일을 통해 개성을 드러냈던 것처럼 그가 주거, 직업, 결혼 문제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자신을 표출함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하려던 것은 아닐까 하는 씁쓸한 생각도 일긴 했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드라마에서 자주 볼 법한 “그래서 나다운 게 뭔데?” 하는 질문에 쉽게 대답하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다. 학창시절 복장이나 용모 단속 등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억압당하는 데 너무도 익숙한 우리들은 사회인이 되어서도 그 사회의 규율과 분위기가 정하는 억압 속에서 ‘평범하게’ 살아갈 것을 요구 받는다. 그렇게 다수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검열하면서 ‘욕구 불만의’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면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된 것도 ‘나다움’을 찾기 위해서였다. 방법이 무엇이든 간에 지금의 나를 표현하지 않으면 언젠가 스스로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잊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H 역시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억압과 현실의 고민 속에서 어떻게든 나다움을 표출해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형태가 외적 표출이든 내적 자아실현이든 우리에겐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한 출구가 필요한 것 같다. 타인의 인정 여부와 관계없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이 억압된 세계를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소소한 자기로의 일탈을 할 수 있길 희망하며, 어떤 자리에서든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H의 폭탄머리를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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