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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즈킴 Apr 22. 2019

정상성에 대한 고찰

“오늘 가게에 트랜스젠더 같은 사람이 왔는데 엄마가 엄청 놀랐잖아. 아니, 머리로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는데 자꾸 쳐다보게 되고 좀 거부감이 들더라구. 단순히 트랜스젠더라서가 아니라 너무 과하게 치장한 모습? 뭔가 그런 부자연스러움 때문인지 엄마는 그 사람을 보고 있는 게 불편했어.”


TV에서만 보던 트랜스젠더를 처음 마주한 엄마의 반응이었다. 지방의 소도시에 사는 엄마가 성 소수자를 볼 수 있는 일은 그리 흔치 않기에 우리가 소위 말하는 ‘평범함’과 거리가 먼 그들의 모습에 먼저 위화감을 느낀 거였다.


“응, 익숙하지 않으니까 처음엔 불편할 수 있어.”

“아니 근데 왜 꼭 저렇게 해야 될까?”

“글쎄, 그냥 그렇게 해야 자기가 행복해서 아닐까?” 

“엄마는 이해가 안 돼. 게이나 트랜스젠더... 저건 고칠 수 없는 거야?”

“이성이 서로에게 끌리듯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것들이 자연스러울 거야. 다른 것뿐이지 잘못된 건 아니니까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된 거야.”


엄마는 그들을 ‘정상’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더 논의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나 또한 “그 사람들은 그저 그런 것이다” 정도의 의견만 가졌을 뿐 특별하게 엄마를 설득할만한 논리는 없던 지라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엄마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경험이 좀 더 많다고는 해도 막상 어떤 소수자의 삶이 내 인생 깊이 걸어들어 온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막연해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어떤 사람을 정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사회의 규율에 어긋나지 않는, 나 자신과 혹은 내 주변의 비슷한 사람들 정도를 정상의 범주에 넣고 살고 있지 않을까. 


일러스트레이션 : 황하초

스웨덴에 사는 야코브 윤 이에스코우 노셀은 자신의 존재를 바탕으로 정상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정신지체와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20대 장애인이다. 소수자의 삶이 어느 정도는 존중되는 스웨덴 가정에 입양돼 성장했지만 장애를 안고 일반의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테다. 그는 자신의 삶을 담은 연극을 만들며 우리에게 묻는다.


정상이란 무엇인가? 나는 정상인가? 과연 정상과 비정상이 존재한다면 그 경계는 무엇인가? 비정상인 나는 살 가치가 있는가?


“집 안에 있는 나는 정상이지만, 집 밖으로 나가면 난 비정상이 된다.”고 말하는 그의 절규 속에서, 트랜스젠더를 바라보며 정상으로 고칠 수 없느냐는 엄마의 질문 속에서 나는 다시금 ‘정상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그 누군가가 말하는 ‘평범성’ 이상의 정체성, 혹은 광기에 가까운 욕망이 있기 마련이지만 집 밖에 나서며 타인이 인정하는 정상이 되기 위해 연극을 하며 살고 있지 않나. 


장애인,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 소수자들은 그저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려 비정상으로 낙인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결국 우리는 그들이 스스로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며 실존마저 수용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닐까.



‘남과 다름’을 극도로 기피하는 우리 사회에서도 장애인이나 성 소수자를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다수가 이들을 목격하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범주의 존재로서 자각하며 살아간다. 무관심 혹은 혐오의 대상으로서 말이다.


2016년 기준 국내 등록 장애인은 251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4.7%를 차지한다는데 여전히 일상에서 장애인을 마주하기는 어렵다. 이제 장애인 화장실은 상식처럼 어디에나 설치되어 있지만 정작 그 화장실을 사용하는 장애인을 본 적은 드물다. 성 소수자들 역시 일 년에 한두 번 거리에서 펼쳐지는 퍼레이드에 나와 자신을 드러내지만 곧 현실의 장벽 속에서 ‘정상인’을 연기한다. 


당신의 세상.

나의 세상.

기묘하지 않나요?

우리는 모두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데 말이죠.

하지만, 미래에 나같은 인간은 사라질 거에요.

타인에게 인내심을 요구하고 피해를 주는 나같은 존재는 없어질 거예요.

미래에는 표본실에 보존되겠죠.

- 내추럴 디스오더 중에서 -


설령 장애인이 살기 편리한 사회가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장애인을 삶의 동반자로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야코브 윤은 유전자를 선택할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미래에는 자신과 같은 장애인은 사라질 것이라 전망한다. 자신의 아이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크게 괘념치 않고 그 탄생을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 역시도 자신이 없다. 이상적인 생각과 논리만으로는 현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 그럼에도 정상과 비정상이 혼재하고, 언제 어떤 순간에 정상이 비정상이 될지 모르는 이 기묘한 세상 속에서 비정상의 삶을 논하지 않는 삶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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