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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즈킴 Jul 11. 2019

타인의 이혼에 대한 우리의 관심

타인의 이혼은 가십거리가 되기 쉽다. 이른 바 세기의 커플이었던 송중기-송혜교 커플의 이혼 소식몇주가 지난 까지도 뉴스판을 달구고 있다. 이혼 사유를 둘러싼 각종 루머와 심지어 송중기의 탈모에 이르기까지 웃프기도 한 이 광경을 통해 연예인의 개인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아무리 연예인이라고는 하지만 이혼은 결국 두 사람의 속사정인데 정말 저렇게까지 왈가왈부해야 하나 싶을 정도다.


이혼이 가십으로 전락하는 것은 연예인의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우리는 주변의 이혼에 대해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예컨대, 우리가 아는 누군가가 이혼을 했을 때 소문은 삽시간에 퍼진다.


“A가 이혼했대.”

“어머, 정말? 왜 그랬대?”

“나도 모르는데 아무래도 A가 바람핀 것 같아.”

“웬일이야, 근데 A는 왠지 그럴 줄 알았어.”


온갖 추측과 정황은 지난밤 인기드라마의 하이라이트처럼 입에서 입으로 번진다. 그때만큼은 A의 인기가 연예인 부럽지 않다. ‘이혼남’이라는 이미지로 자신의 스토리를 파는 일부 연예인들이 인기를 끌고, 여전히 이혼 자체가 각종 콘텐츠의 자극적인 소재로 등장하는 것처럼 타인의 이혼은 일상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흥미 요소가 되는 것 같다. 내가 글을 기고하는 생활미디어에서도 한 사람의 ‘탈혼기’가 인기리에 연재되는 것을 보았다.  


며칠 전 미국에서 유학하는 대학 동기를 만났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했고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 젊은 부부가 학문의 꿈을 품고 이방인으로 살아간 지도 어느덧 9년 가까이 됐다. 한국에 종종 들어오긴 했지만 그의 얼굴을 다시 본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그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처럼 여전히 밝아 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얼굴에 긴 그림자가 걸려 있었다. 직감적으로 결혼생활과 관련된 사정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괜한 질문일지 모른다는 망설임이 들었지만 그의 근황이 진심으로 궁금해 입을 열었다.


“근데 너, 남편이랑은 잘 지내고 있는 거니?”


그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꺄르르 웃으며 “뭐야. 내 얼굴에 나 잘 못 지낸다고 써 있어?” 하고 반문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사실 나 남편이랑 잘 못 지내. 내년쯤 이혼할 것 같아.”


그는 ‘성격차이’ 정도로 이유를 제시했고 나 또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 이상 구체적으로 묻지 않았다.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했고 두 사람 모두 불안정한 시기에 타지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았으리라 짐작했다. 무엇보다 스스로 마음의 정리조차 되지 않은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속속들이 하는 것 자체를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설령 세세한 이야기를 다 듣는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을 가늠조차 할 수 없을 터였다. 나는 친구에게 마음을 잘 추스르라는 말 외에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상대방을 생각한다는 의도로 어줍잖은 조언이라고 했다가는 주제넘은 소리가 될 게 뻔했다.


친구는 오랜만에 만나서 괜히 자신의 우울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되레 민폐일까 걱정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 모든 사건이 놀랄 만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우리는 누구나 힘들고 어지러운 상황에 직면하기 마련이니까. 우리는 때로 어리석고 선택과 후회를 반복하며 살아가니까. 누군가를 사랑했고 결혼을 하고 막상 살아보니 서로 행복하지 않다면 갈라설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물론 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서로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깨뜨릴 수는 없는 어려운 종류의 약속이긴 하지만, 나를 불행하게 하는 구속이라면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현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맞지 않은가.(사실 나는 결혼을 해본 것은 아니라 짐작만 할 뿐이다)


통계상으로도 국내 이혼률은 매년 증가하는 추세일 뿐더러 '이혼전문변호사'가 주목받는 새로운 직종으로 떠오르고 있다. 주변에도 이미 이혼을 한 30대 친구들이 더러 있다. 과거에 비해 이혼은 보다 일상적인 삶의 선택이 되었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혼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달갑지 않은 것 같다. 그렇기에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냥 불행한 결혼을 '참고' 살거나 이혼 사실을 '숨기고' 산다. 특히 부모 세대에게는 자식이 클 때까지, 혹은 결혼을 할 때까지 이혼을 유보하며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익숙하다. 그래서 이들보다는 좀 더 쉽게 결혼을 중단하는 요즘 세대들을 보며 "결혼을 우습게 여긴다"거나 "참는 것을 못한다"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혼을 결정한 이들 정당하게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8명의 여인들

프랑스와 오종 감독의 영화 <8명의 여인들>(2002)에서 남편을 살해한 마미는 오래 전 자신이 남편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여자 팔자란 그런 거야. 시대에 따르고 다르고 세대에 따라 달라. 너희 아버지는 매우 총명했고 날 사랑과 존경으로 대해주는 진정한 신사였지만 난 참을 수가 없었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평생을 산다고 생각해 봐. 그 때는 이혼을 생각할 수도 없었어.”


이처럼 참을 수 없는 사람과 일평생을 보낸다는 것은 누군가에는 살인불사할 만큼 극단적 고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연애와 결혼은 그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무수한 관계로 얽혀 있기 마련이다. 겉보기에는  A라는 남자의 행동이 비난 받아 마땅한 이혼 사유처럼 보여도, 실제 이들의 결정에는 그들만이 아는 어떤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타인의 이혼을 가십거리마냥 입에 올리며 왈가왈부하는 것도, 함부로 판단하며 이혼의 당사자들을 평가하는 것도 너무도 가혹한 참견인 셈이다.


남편과의 이혼을 결심한 친구는 서로의 마음을 확신할 때까지 약 1년 정도의 유보 기간을 두기로 했다고 했다. 한동안 따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며 다시 함께 걷는 삶의 의미를 숙고해보기로 했다는 것. 현명한 판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와 헤어지면서 나는 에게 "문제가 잘 해결되어 다시 잘 되었으면 좋겠다" 따위의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되는 것이 어떤 결말일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니 말이다. 분명한 점은 결국 두 사람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친구가 스스로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결정을 내리길 바라며, 먼 훗날 대학 동기들이 모였을 때 그의 이혼이 가십처럼 소비되지 않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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