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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즈킴 Nov 08. 2019

계약직이라는 이름

51세 계약직원과의 무거운 작별

오늘은 부서 내 계약직원의 마지막 출근일이었다. 그가 우리와 함께 한 시간은 고작 4개월. 51세의 A는 다시 취업 전선에 나선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일손이 부족해지자 팀장은 일을 도맡아 할 정규직원을 채용하기보다는 임시방편으로 4개월 단기 계약직원을 채용하자고 했다. 1년도, 6개월도 아닌 겨우 4개월짜리 계약직 공고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원할까 싶었지만 의외로 우수한 스펙과 다양한 경력을 지닌 지원자들이 입사지원서를 보내왔다. 


흰머리가 희끗한 A는 사실 ‘나이’ 때문에 애초 지원 당시 합격자에서 배제됐었다. 그는 팀장보다도 나이가 많기 때문이었다. 결국 명문대를 졸업한 28세 남성 직원이 들어왔지만 그는 한 달이 채 못되어 더 좋은 조건의 일자리를 찾아 미련 없이 떠났다. 그 자리를 메워준 사람이 바로 A였다. 급한 나머지 우리는 계약직 공고에 지원했던 나머지 지원자들에게 계약기간이 3개월밖에 남지 않은 이 자리에 와서 일해주기를 간청했다. 고맙게도 A는 선뜻 출근 의사를 밝혔다.


겨우 3개월짜리 단기 계약직 자리였지만 그가 담당해야 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신규 사업이다 보니 기존의 관련 업무들을 정리해야 하는 것은 물론 타 부서 담당자들과 미팅하며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가야 했다. 그는 꽤나 중요한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약직’이라는 이유만으로 팀의 정식 직원으로 소개받지 못했고 노력에 따른 성과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다.


나이에 대한 우려가 무색하게 A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해당 직무 관련 경력도 많은지라 전임자가 어려움을 겪던 업무도 척척 해나갔다. 무엇보다 그는 삶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주말이면 여행을 다니며 사진을 찍는가 하면 서울시에서 진행하는 각종 공모전 및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일에 몰두했다. 나는 A를 보면서 삶에 대한 태도를 많이 배웠고, ‘나이’라는 틀에 갇혀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됐다.


A가 촬영한 사진 작품 중 하나(허락을 구해 업로드합니다)


A가 처음부터 계약직인 건 아니었다. 그에게도 당장 내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안정적인 직장이 있었다. 병환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돌볼 이가 없자 그는 반자발적으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병실을 지키는 선택을 했다. 40대의 나이에, 게다가 여성으로서, 몇 년의 경력 단절 끝에 제대로 된 직장을 다시 갖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그렇게 A는 계약직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그는 자신이 앞으로 정년이 보장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A의 계약기간이 끝나기 며칠 전, 나는 그에게 용기 내어 물었다.


“혹시 다른 곳 구직 활동은 잘 되어 가시나요?”

“아뇨, 계속 지원서를 넣고 있긴 한데 죄다 서류에서 떨어지고 있어요. 쉽지 않네요.”
 

그는 넉살 좋은 미소로 답했지만 눈빛에는 퇴직을 앞둔 불안감과 조급함이 묻어났다. 그 동안 계약이 만료되어 회사를 떠난 몇몇의 직원들과 작별해왔지만 이처럼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진 적은 없었다. 그의 상황이 안타까웠을 뿐 아니라 남일처럼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31세라는 꽤 늦은 나이에 일을 시작했다. 대학원 졸업 후 20대 후반부터 일을 구하기 시작했는데 면접 때마다 듣는 소리가 나이가 너무 많다는 거였다. 스스로 아무리 노력하고 적합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물리적 나이가 발목을 잡았다.( '80년대생 미즈킴씨를 시작하며'라는 글에서 구체적인 사건을 다룬 적이 있다.) 나이 많은 여성에게 결코 관대하지 않은 이 사회에서 50을 넘긴 여성이 새로운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떠나는 A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가 속한 노동 환경과 나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본다. 며칠 전 통계청이 발표한 ‘2019년 경제활동인구조사 근로형태별 부가조사’ 결과를 보면 올해 8월 기준 전체 임금노동자 2055만 9천명 가운데 비정규직은 748만1천명(36.4%)으로 지난해보다 86만7천명 증가했다. 정부가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추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고령화 및 그동안 통계에 잡히지 않았던 숨은 비정규직이 등장하면서 나온 결과라고 한다. 


하지만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한다고 해서 과연 노동시장의 불균형 문제가 해결될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아무리 많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만든다 해도 비정규직이라는 노동 형태는 사리지지 않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 회사에서도 근로자 입장에서도 비정규직이라는 노동 형태가 필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이 문제가 되는 건 그들의 노동 환경이 너무 열악하기 때문이다. 같은 통계 결과에 따르면 비정규직 월평균 임금은 172만9천원으로 정규직 월평균 임금(316만5천원)과 비교하면 55% 수준에 그쳤다. 임금뿐 아니라 회사 내에서 담당하게 되는 업무의 질이나 구성원간 보이지 않는 인식의 차별 또한 비정규직을 꺼리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A가 그러했듯 우리 모두 언제 어떻게 직장을 그만두게 될지 모를 일이다. 회사 사정이 나빠져 정리 해고를 당하는 최악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개인적 사정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비정규직으로서 가치로운 삶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면 굳이 안정성을 담보로 불행한 회사 생활을 이어가기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도 모르는 새 남의 일마냥 하찮게 여겼던 계약직이라는 이름을 되새겨봐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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