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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즈킴 Sep 25. 2019

햇콩 같은 엄마의 환갑에

엄마가 시를 쓰기 시작했다

지난 월요일, 엄마의 환갑을 맞아 군산에 다녀왔다. 한 주 전 추석을 지내러 이미 집에 다녀온 터라 엄마는 내려오지 말라 재차 당부를 했다.


“지난주에도 내려왔잖아. 마음만 받을게, 수고스럽게 또 내려오지 마.”


나는 건성으로 알겠어, 대답만 하고 군산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엄마의 생일을, 게다가 환갑을 대충 넘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내려오지 말라니까 왜 내려왔냐며 지청구를 하는 듯했지만, 이내 열띤 얼굴로 한주 간 못다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군산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청하라는 시골 마을에서 자란 엄마는 그야말로 소설 <82년생 김지영>에 나올 법한 ‘희생적’ 여성을 대변하는 삶을 살았다. 모두가 가난했던 그 때, 엄마는 여섯 형제 중 둘째이자 장녀로 많은 것을 양보하고 포기할 것을 강요받았다. 


일례로 엄마는 고등학교 시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였지만, 당시 재수를 하던 오빠의 상황과 맞물려 대학 입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당시 외갓집은 집안에서 동시에 둘이나 대학에 보낼 형편이 되지 않았다. 대학 입학의 기회는 당연히 장남에게 돌아갔다. 스무 살 되던 해, 엄마는 아직 어린 동생들이 줄줄이 딸린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은행에 취직했다. 수많은 밤 뒷산에 올라 대학에 가지 못한 슬픔을 울음으로 풀어내던 그 때,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결혼을 한 뒤에도 엄마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부잣집에 시집 가 편하게 살 수 있다는 환상에 기대어 시작한 결혼 생활이었지만 부유한 집 막내아들로 자란 아빠는 생활력이 없었다. 그 세대라면 먹고 살기 위해 누군들 열심히 살았겠지만 엄마는 아빠를 대신해 가게 일을 도맡아 하고, 두 딸을 혼자 힘으로 키웠다. 어린 시절에는 엄마의 수고로움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지만 돌이켜 보면 삶의 무게에 눌려 그토록 치열하게 살던 그 때,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였던 것 같다. 


“엄마, 엄마는 어떻게 그걸 다 해냈어? 종일 일하고 우리 키우면서 아침마다 도시락까지 싸줬잖아. 나 같으면 못했을 것 같아.”


“그때는 다들 어렵고 힘들게 사니까 사는 게 원래 그런 줄 알았어. 억울한지도 몰랐어, 엄마는.”




3년 전 엄마는 글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문학에 대한 엄마의 애정은 남달랐다. 엄마 옆에는 늘 책이 있었다. 가게에서 일을 할 때도, 잠들기 전에도 엄마는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책을 읽었다. 본래 문학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엄마는 문학 속에서 삶의 남루함과 고단함을 잊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일을 많이 하고 바쁜 와중에도 엄마는 시립 도서관에서 매년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시민에게 수여하는 독서왕을 차지할 정도였으니까.


이제는 생활도 안정되고 뒷바라지할 어린 딸들도 없는 지금, 엄마는 자신을 짓누르던 삶의 무게를 조금 내려놓고 자신만을 위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수업을 듣고 사람들과 어울려 하하호호 문학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며 과제 마감을 앞두고 밤새 골머리를 앓기도 한다. 요즘엔 신경을 너무 많이 써 입안에 뾰루지를 달고 살지만 그럼에도 엄마는 문학 안에서 충만해지고 황홀하다고 말한다. 나는 엄마가 건강까지 잃어가면서 글을 쓸까봐 조금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엄마의 오늘이 자랑스럽고,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엄마의 환갑날, 가족들과 함께 군산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셔다 드리기 위해 외가에 들렀다. 간밤 태풍 타파의 흔적으로 어느새 노랗게 익은 벼가 군데군데 쓰러져 있었다.비 온 뒤 어느 때보다도 파란 가을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논길을 바라보며 엄마는 잠시 회상에 잠긴 듯했다. 


“수확 앞두고 저리 돼서 어째. 엄마 어릴 때는 저 논밭길을 매일 종종 걸음으로 뛰어다녔는데...”


앳된 엄마의 얼굴을 한 키 작은 소녀가 자기 몸통보다 더 큰 가방을 메고 저 금빛 논길을 거니는 모습을 상상하니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문득 슬퍼지는 까닭은 꿈을 포기해야 했던 그 소녀가 안쓰러워서인지, 엄마의 젊은 날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어느 덧 60이 된 지금도 별처럼 반짝이는 엄마의 눈빛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엄마는 과제로 제출해야 할 시를 써야 한다며 노트북을 펼치고 시 한 편을 써내려갔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논길에서 엄마는 일곱 살 그 시절로 돌아간 것이 분명했다. 젊은 날의 태풍이 지나간 엄마의 마음도 고요했던 외가의 풍경처럼 시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일러스트레이터 : 화림 이기옥



그때 알았더라면


논길 산길 따라 오릿길

학교 가는 길


앞서 가던 오빠 뒤돌아서서 

빨리 오라 채근을 하면


콩콩 뛰던

콩깍지 속 햇콩 같은 일곱 살


학교 가는 길은 멀고

수숫대 같은 오빠는 무섭고


아무리 뛰어도 닿을 수 없는 것은 

닿을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논물 속 파란 하늘도

자운영 꽃반지도 초록 올챙이도

함께 데리고 왔을 것을


옆도 보고 

뒤도 돌아다보고 하늘도 올려다보며

걸어왔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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