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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 Dec 06. 2022

그 해의 뉴욕

스물다섯의 가을

그 해의 뉴욕은 어두웠다.


2016년 스물다섯의 8월, 뉴욕에서 대학을 막 졸업하고 오랜 목표였던 치의학대학원 진학을 위한 DAT(Dental Admission Test) 시험을 준비하던 난 입시생이었다. 진행 중인 리서치 연구로 뉴욕을 떠날 수는 없었지만 졸업 후 소속감이 사라지니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것 같아 일부러 직장인들이 많은 맨해튼 42가의 Bryant Park 시립 도서관을 찾아 시험공부를 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검정 양복 차림의 금융인들이 우르르 나와 샐러드나 샌드위치를 사 가는데, 그들의 바쁜 발걸음 사이 난 레깅스와 나이키 운동화의 차림으로 공부자료를 한 손에 들고 그들만큼 바쁜 일이 있다는 듯 다른 손으론 샌드위치를 급히 욱여넣으며 가게 문을 나섰다. 언젠가 점심을 먹고 돌아갈 “나의 자리” 가 생길까? 도서관으로 돌아오는 길, 하나 둘 물들어가는 낙엽을 보면 쓸쓸함에 눈가가 붉어졌다.




대학시절의 뉴욕 생활은 생기가 넘쳤다.
시험기간이 되면 빼곡히 학교 도서관을 메운 사람들과 동질감을 느끼며 밤을 새웠고, 시험이 끝나면 문제를 어렵게 출제 한 교수님을 탓하며 친구와 학교 뒤 소호거리를 배회했다. 금요일 밤엔 롱부츠에 가죽재킷을 걸치고 친구들과 뉴욕의 루프탑에서 칵테일 한 잔을 마시고 집에 돌아오던 즐거운 때가 있었지만

졸업장을 손에 쥐고 떠밀려 나온 학교 울타리 밖의 뉴욕은, 그저 낯설고 외로운 곳이었다.


미국의 대학원 진학과정은 모든 서류 준비를 마쳐도, 원서 접수 후 입학이 결정되기까지 그 과정만 딱 1년이 걸린다. 대학 내내 성적이며 리서치 활동이며 나름 애를 썼는데, 막상 이력을 하나씩 적어보니 나쁘지 않은 성적과 특별할 것 없는 외부활동 몇 줄이 전부였다. 심지어 인종 별로 합격률을 정해 둔 미국의 입학 사정에서 난 합격률 한 자리 숫자의 경쟁률이 가장 치열한 동양인.


난 이 무거운 현실을 피해 도망치고 싶었다.


Bryant Park / 출처: Google Image


어느 날 한 숨 돌릴 겸 Bryant Park를 걷다가 오랜만에 만난 선배를 마주쳤다. 근처 금융사에서 일을 하는데 외부 미팅을 가던 길이라며 "주말에 밥 한번 먹을래?" 물어왔다. 데자뷔. 몇 년 전 친구 생일파티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밥 한 번 먹자 연락이 왔었다. 다음에 먹자며 넘겼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엔 "그래요 “ 흔쾌히 답했다. 큰 키 때문인지 빳빳한 검정 양복이 그와 참 잘 어울렸고, 그날은 물 든 가을 낙엽이 참 예뻐 보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 허우적대다 닿은 반갑고 따뜻한 섬 같았다.

그렇게 선배와 한동안 자주 만나 밥을 먹고 연락을 주고받았고 시간이 나면 공원에서 만나 커피 브레이크를 가졌다. 그 낙에 아침마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걸음도 가벼웠다. 나보다 4살 많던 선배는 뉴욕에서 혼자 살다 보니 일찍 결혼을 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고 띠용! 내 머릿속엔 답 하나가 떠올랐다.


 아, 나 그냥 결혼을 할까?

서른한 살이 된 지금 결혼은 또 다른 현실임을 알지만 당시 스물다섯 살의 난 결혼이 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선배를 만난 이후 들뜬 마음에 난 도서관에 가는 길 편한 운동화 대신 첼시 부츠를 신는 날이 늘었다. 그의 평범한 행동조차 멋져 보였고 내겐 이 관계가 절실해졌다.


그리고 이는 두세 달도 채 못 되어 끝이 났다.

어느덧 8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인지 흑역사 같은 기억이어서인지 선배와 어찌 끝이 났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의 바쁜 스케줄이 멀어진 핑계였지만 어느 순간 시소만큼 기울어 철저한 "을" 이 된 내 태도를 그도 느끼지 않았을까?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해 펑펑 울다 잠든 밤만큼은 또렷이 기억난다.


동등하고 다른 두 사람이 만났지만 선배를 한 사람으로 알아가며 자연히 서로에게 스며들기도 전, 난 내가 갖추지 못한 그의 윤택한 삶을 동경하며 그 사람을 도피처 삼아 기대고자 했다. 우리 관계가 끝나고 보니 스스로가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언제부터 이렇게 작아진 것인가.


만약 선배와의 관계를 지속했더라도, 그에게 내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줄 수 있었을까? 아니, 그랬다간 우리 사이가 어긋날 까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그럼 반대로, 나는 그 선배에게 좋은 사람일 수 있었을까?

난 내 필요에 의해 상대방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한 채 긍정 회로만 돌리며 굴곡된 시선으로 그에게서 내가 보고 싶은 모습만을 찾아냈을 것이다.



그 해의 가을은 유난히 아프고 어두웠지만, 난 다시 운동화를 신고 도서관을 찾았다.

스스로에게 떳떳해지기 위해서 그리고 그런 나와 함께 걸어 줄 잘 맞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감정적으로 온전히 자립(自立) 할 준비가 되어야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다. 무언가 바라지 않고 상대방을 온전히 들여다볼 용기가 생기고, 나 또한 상대에게 진실된 모습을 보여줄 여유가 생기더라.


우리 부모님은 30년쯤 같이 살다 보니, 이제야 서로를 조금 알겠다는 말씀을 하신다. 결혼이란 서로의 한계점을 넘어 이해하고 배려하고 맞춰가는 연속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편하고 대화의 주파수가 맞는지, 서로를 믿고 응원해 줄 만큼의 존중과 신뢰가 있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난 더 준비된 사람이 되어 이러한 삶의 태도가 잘 들어맞는 남편을 만나 함께 손 잡고 살아나가고 싶고, 그에게도 그런 아내가 되도록 준비된 사람이고 싶다.


8년이 지나 이때를 회상하며

지금의 내 모습이 더 괜찮게 느껴지니 참 다행이다.


그 해의 뉴욕은 참 찬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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