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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어떻게 학부모가 되는가

학교가 기대하는 바람직한 학부모의 모습은 무엇일까

by 김의진

2020년 어느 날. 교육청이나 학교 관계자 외의 누군가에게는 처음으로 원고 요청을 받았다. 교육분야 전문 계간지라고 하였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검색해보니 진보적인 교육철학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글을 전문적으로 발행하는 출판사인듯 하였다. 나는 특별한 교육운동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교원단체 활동도 하지 않았으며, 학창 시절 학생운동도 하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나한테 왜?”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교육 현안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공부해 본 적도 없었기에, 아주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유를 들어보니, 내가 브런치에 썼던 글들을 보고 그 중 하나를 편집하여 실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코로나 기간 중에 온라인으로 진행되며 시행착오를 겪고 있던 체육 교과 수업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이 안타까워,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었다. 바로 그 시기였다. 내가 단독으로 책을 낼 수준이 아니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몇 쪽이라도 글이 실릴 기회를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글과 비교될까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아주 작은 걱정에 불과했다. 그렇게 처음 글이 실린 책이 계간지 ’민들레 132호‘였다. 교보문고에서 검색하면 나오는 책에 공동 저자로 내 이름이 검색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즐거웠다.


그냥 인터넷 공간의 글쓰기 플랫폼에 잡설을 끄적였을 뿐인데, 이런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이 참 신기했다. 브런치에 계속 글을 쓰게 된 것도 그 이후였던 것 같다. 이후에도 몇 차례 더 기회가 있어 계간지에 두 차례, 선집에 두 차례 글이 실렸다. 이 책은 2023년에 발간된 계간지 ‘민들레 149호’에 실렸던 내 글 “1980년대생 학부모는 무엇이 다른가”가 재편집되어 실린 선집 15호 “부모는 어떻게 학부모가 되는가“이다. 민들레 출판사에서는 계간지에 실린 글들과 몇 몇 글을 모아서 특정한 교육 분야의 주제로 묶어서 선집을 출판하는데, 이번 책의 주제는 2023년 이후 이슈가 되고 있는 학부모에 관한 내용이었다. 내가 쓴 글이 실렸다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어떤 글들과 함께 묶여있는지 관심이 생겼다.


1부는 교사와 교육 분야 전문가들이 학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글의 모음이고, 2부는 학부모들이 어떤 학부모가 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학교와 우리 사회에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글의 모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부끄러운 내 글 역시 1부의 한 부분이었다. 그동안 읽었던 민들레 출판사에서 나온 책에서는 진보적인 교육운동의 맥락이 느껴졌었다. 혁신학교와 대안교육을 지지하는 학부모들의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2023년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보수화되고 있는 학교 문화에 대하여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교육 당국자로 6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꼰대적 본질이 체화된 나같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까하는 의문도 들었다.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고, 교육청에서 교육 당국자가 되어서 지내왔던 사람 중 한 명으로써 1부에 담긴 글들에는 상당 부분 공감할 수 있었다. 1부를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존중’이었다. 내 글도 자신들의 학창시절 경험에 비추어, 변화한 학교환경을 인정하지 않고 아주 쉽게 교사를 존중하지 못하는 학부모들에 대한 아쉬움이 주 내용이었다. 글쓴이는 여럿이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더 존중하면 좋겠다는 마음은 하나였다.


존중이란 무엇일까. 소극적으로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지 말아달라는 뜻일테고, 적극적으로는 전문성을 기반으로 하는 고유의 역할을 인정해 달라는 뜻일 것이다. 일부 학부모들이 교사를 존중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다수의 학부모들이 학교를 교사를 존중하기 때문에 우리 대한민국 교육이 잘 굴러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율적으로 보면 어느 집단에나 있을 법한 이상한 사람들의 비중 정도, 아니면 그보다도 못한 수의 상식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이슈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이 더 악을 쓰고 더 독해질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2부에 담긴 글은 학부모로서 자신들의 역할을 고민하는 내용들이었다. 자녀를 학교에 믿고 맡기는 수준을 넘어, 학교의 운영과 중요한 의사결정에 관여하여 바람직한 방향으로 교육을 이끄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이른바 괴물같은 학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학부모들이 어떻게 학교 교육을 받아들이고 어떤 모습으로 참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들이었다. 교육과정, 교육계획 등에서 본인들이 배제된다는 느낌에 대한 아쉬움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학부모의 의견에 흔들리지 않고 뚝심있게 밀고 나가는 추진력있는 교사의 모습을 기대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교사였고, 학부모인 지금도 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들과 가정에서 배워야 할 것들을 구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나로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부모 개인이 자녀의 교육을 고민하고 책임지는 시스템을 넘어, 학부모라는 사회적인 의미의 그룹이 교육의 주체가 되어 범국가적인 유기적인 교육 시스템 속에서 학생들을 교육해야 한다는 주장이 2부를 관통하는 내용인 듯했다. 수 많은 학생들이 넘쳐나던 학교의 시대는 끝났다. 한 명 한 명의 학생들이 더욱더 소중해지고 있다. 과거와 같이 훌륭한 학생 몇 명을 배출하면 그들이 절대다수를 행복의 나라로 이끌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단 한명의 학생도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불가능한 임무가 학교에 주어지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국가가 교육을 통한 공정한 경쟁 시스템을 운영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도 우리 사회의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동시에 여러가지 역할을 기대받는 학교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교육 당국자의 입장에서 학부모는 존중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교육의 대상이기도 하다. 학부모들의 입장에서는 교육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초중등교육법이나 학교폭력 예방법 등의 법령에 따라 학생에게 교육적 조치를 결정할 때, 함께 부과되는 학부모 교육의 이수율이 100%가 아닌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른바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모든 학생의 뒤에 문제가 있어 보이는 학부모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문제가 있는 학부모와 함께 자란 학생은 문제가 있는 학생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학부모를 교육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 그 자체가 기분이 나쁠 수는 있겠지만, 학생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학교와 가정이 협력해야 하기에 이 부분은 더욱더 강조되어야 한다는 의견에 공감한다.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문화가 바뀌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발행인이 쓴 마지막 글은 한 명 한 명의 학부모가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교육 ‘시민’으로서의 학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제도적으로도 학부모가 학교 교육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을 확대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자녀의 문제가 얽히고 섥혀 있는 상황에서 왜곡된 의사결정을 하고도 부끄러움이 없는, 아니 부끄럽더라도 자녀의 미래를 위해 정의롭지 않은 그런 의사결정을 하고야 마는 사례를 많이 봐 온 나로서는 크게 공감하기 어려웠다. 물론, 글쓴이가 이야기한 것처럼 합리적이고 옳은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학부모들이라고 하면 충분히 잘 되겠지만 말이다. 학교란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융합되는 용광로 같은 곳이다. 그래서 참 어렵다. 이 어려운 판에 들어와 있는 모든 사람들을 존경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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