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노트

거창한 글쓰기말고, 습관적으로 기록하기.

by 김의진
기록은 단순하다. 매일의 나를 남기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고 겪고 느끼고 만나고 행하는 모든 것을 메모하면 그 메모에서 자신이 어떤 가치를 중요히 여기는지가 드러난다. 그것을 정리해 남기는 것이 바로 기록이다. 기록하면 인생이 심플해진다. 문제로 여겼던 것이 아누먹소 당닌 일이 되고 고민은 쉽게 풀린다.


오래동안 기억에 남을 책을 읽었다. 책을 열 때는 제목이 의심했지만, 책을 덮고 나니 제목을 야심차게 ‘거인의 노트’라고 지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책의 저자는 ‘기록학’이라는 생소한 학문을 공부하여 대학 교수까지 된 사람이다. 그렇다. 기록이 습관을 넘어 학문의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모양이다. 심지어, 이 학문은 일본 최고의 대학이라는 동경대에서 박사학위까지 준다고 한다. 저자는 그렇게 기록이 업이 되었고,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 덕분에 청와대 국가기록 시스템의 구축되었다. 시중에 그 많은 글쓰기 책과는 다른 ‘기록(記錄, record)’에 관한 내용이 오랫동안 내 삶에 영향을 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메모와 기록은 다르다. 쉽게 설명하자면 메모는 기록이 원천이다. 시간이 부족해서, 상대방의 말이 너무 빨라서 등의 이유로 너저분하게 적어둔 것을 ‘메모’라 한다면, 이렇게 조각난 글들을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을 ‘기록’이라 한다. 즉 기록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적는 메모를 제대로 정리하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조금 더 학문적으로 접근한 것이 ‘기록학’이다. 기록학은 기록을 생산-분류-기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게 하는 학문이다. 기록학의 이론과 체계를 조금만 안다면 메모를 잘하는 방법뿐 아니라, 메모를 기록으로 발전시켜 잘 활용하기까지의 메커니즘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메모 그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메모를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를 해야 의미가 부여되어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기록학은 바로 이 방법에 대한 학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록을 잘 하기 위해 모두가 기록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기록학에 대한 구체적인 안내보다는, 기록하는 행위에 대한 가치와 기록을 잘 하기 위한 노하우 등을 가볍게 전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아카이브란 자료를 디지털화해 한데 모아 관리하고, 필요할 때마다 검색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쉽게 꺼내 볼 수 있게 하는 장소 혹은 그 기록물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카이브는 기록물을 모아 둔 지식의 보고다.


수 많은 기록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분류와 관리를 잘 해야 한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궁금한 주제가 있을 때면, 아주 자연스럽게 디지털 기기를 꺼내어 정보를 검색하며 살아간다. 다른 사람들이 생산한 정보도 잘 검색하기 위해서는 어떤 키워드를 검색창에 넣어야 할지 고민을 하는데, 자신이 생산한 기록물을 필요할 때 스스로 꺼내어 활용하기가 어렵다면 기록하기 위해 했던 노력이 슬퍼질 것이다. 기록학에 따른 체계적인 기록물 관리까지 도달팔 필요는 없지만, 자신만의 기록물 관리 체계를 마련해 두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되면, 기록은 글감이 되고 아이디어의 보고가 되고 일의 자원이 될 수 있다.




3단계 기록법을 실천해 보라. 기록하고, 기록을 반복하고, 기록의 반복을 지속하는 것이다. 기록하면서 자신을 인식하는 게 첫 번째 단계다. 두 번째는 기록을 반복하는 것인데 단순히 되풀이해서 쓰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만의 방식으로 기록을 정제하고 업그레이드하라는 뜻이다. 오늘은 업무 내용에 대해 기록했다면 내일은 업무에서 어떤 점을 느꼈는지 기록하자. 그다음 날은 업무에서 느낀 점에 대해 고민한 내용을 추가해서 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록의 반복을 지속하면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 (중략) 내가 제안하는 방법은 ‘기록하고, 되뇌고, 말하는’ 것이다. 기록형 인간의 기억법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기억은 담금질할수록 오래 남는다. 자기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기억의 출발이라면, 그것을 메모하는 것은 기억의 첫 번째 담금질이다. 그리고 메모한 것을 다시 꺼내 되뇌어 보는 것은 기억의 두 번째 담금질이다. 마지막 세 번째 담금질은 다시 말과 글로 내뱉어 보는 것이다. 이렇게 세 번째 담금질까지 마치면 이 기억은 우리 머릿속에 아주 공고히 자리 잡게 된다.


저자가 제안하는 기록법은 3단계로 의외로 간단하다. ‘기록하고, 반복하고, 지속하라’는 것이다. 메모를 하고, 메모를 보며 되뇌이고, 말과 글로 뱉어내면 완벽한 기억이 된다. 기록을 통해서 지식과 지혜를 더 많이 쌓을 수 있다는 의미다. 기록하는 행위는 그래서 더 가치가 크다. 기록하는 행위가 일상화되는 과정을 통해서 생각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나만의 기록하는 체계, 즉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다.


기록이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체계적인 습관이 되면, 일이나 대인관계 등 모든 부분에서 큰 힘이 된다. 저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록을 이어나가며, 연간 다이어리가 아니라 월간 다이어리를 작성하는 자신만의 기록 습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남들은 일 년에 한 권 쓰기도 어려운 다이어리를, 매월 한 권씩 완성했다니 놀랍기도 했다. 주제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일상의 모든 것, 생각이나 느낌까지 모두 기록했기에 가능한 습관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기억의 대체 수단으로 기록을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기록하는 일이 주는 직접적인 효용은 사실 기억이 아니라 ‘집중’이다. 기록하기 위해서는 내용에 집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록해야 하므로 무엇이 핵심인지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맥락을 이해해 나가는 것이 기록의 숨겨진 능력이다. 이렇게 집중하고 이해했으니 기억하기 쉬운 건 당연한 결과다. (중략) 기록을 하는 행위 역시 우리의 경험과 기억, 지식과 정보를 선별해 새롭게 만드는 행위다. 창조적인 기록들은 이렇게 탄생한다. 요약한 것은 요약하지 않은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잔상에 남는다. 잔상에 남는 것들을 순간적으로 편집하는 능력이 커지면 수준 높은 창조적 생각에 이를 수 있다.


기록은 중요한 정보를 기억하지 못할 때, 다시 찾아보기 위해서 미리 정리하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기록을 하다보면 기록하는 행위 그 자체 덕분에 저절로 더 잘 기억하게 되는 효과가 있다. 기록을 하는 과정에서 어떤 정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생각을 하게 된다. 기록하기는 어떤 정보를 선별하여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대화하며 기록을 할 때면 무엇이 핵심인지에 집중할 수밖에 없으며, 집중을 하기 때문에 맥락을 이해하여 의미있는 정보를 선별해낼 수 있다. 기록하는 행위를 통해서 무엇인가 새로운 가치가 자연스럽게 창출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경험했거나 새로 이해한 지식은 결국 우리 머릿속의 ‘생각’으로 집결된다. 그러니 기록의 출처는 생각이다. 잠시 고개를 들어 생각을 정리하지 않은 사람은 좋은 기록을 남길 수 없다. 챕터를 읽고 키워드 위주의 요약을 남기는 것은 습득한 지식에 자기만의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다. 이 자기식 질서가 내 머릿속에 있는 지식의 원질서다. 마지막으로 책을 다 읽고 재차 정리해서 말로 내뱉어 보는 것은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는 목적, 즉 활용 목적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중략) 내면의 소리는 계속 생각하고 메모하며 ‘명시화(explicit)’하는 과정에서 들을 수 있다. 우리 내면의 수많은 것들은 액체 상태로 존재한다. 이들 중 일부만 선택해서 고체 상태로 만들어 주는 게 바로 기록의 역할이다.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으로 떠돌던 것은 기록을 통해 일종의 확정 상태가 된다. 물처럼 흘러가는 생각, 심상, 회상, 기억, 감정 등 우리 안에 내포된(implicit) 것을 명시화함으로써 우리는 잠재성을 현실 능력으로 활용할 수 있다.


기록을 할 때는 반드시 생각을 하면서 써야 한다. 그냥 옮겨 적은 내용은 내 것이 될 수 없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내용을 요약하여 기록하는 과정이 바로 생각이다. 그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서 이해를 완료해야 내 말로 다시 쓸 수 있다. 작가는 그래서 키워드 위주의 요약을 남기는 기록을 자식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라고 표현했다. 기록은 이런 중요한 목적성을 가진다.




‘공부를 잘하기 위한 세 가지 기록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확실성이다. 내가 공부한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스스로 확실하게 소화한 내용만 기록하거나 설명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요약성이다. 내가 알게 된 내용 전체를 모두 기억하기는 어렵다. 공부해야 할 내용이 넘쳐나는 와중에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키워드로 메모하고, 그것을 보고 원래 지식을 떠올려야 한다. 키워드를 보고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교과서나 참고서를 뒤져 보면 된다. 세 번째는 종합성이다. 메모해 놓은 키워드들을 내 생각 순서대로 재정렬해 보는 것이다. 이는 지식을 지혜로 만드는 과정과 유사하다. 내가 익힌 지식들을 상황에 맞게 필요한 형태로 편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고난도 문제까지 풀어 나갈 수 있다.


조금은 뜬금 없는 느낌이 들었지만, 많은 학부모들이 궁금해하는 '공부를 잘 하기 위한 기록법'도 빼놓지 않았다. 그 비법은 대단하지 않다.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하게 아는 핵심적인 내용을 기록해 두라고 했다. 나중에 다시 기록을 보면서 공부를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기록을 하면서 생각하는 공부를 하라는 뜻이었다. 다른 학생이 시험범위의 내용을 요약해 놓은 노트를 아무리 살펴봐도, 온전히 내것으로 만들기 어렵다. 다른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른바 난잡해 보이는 노트라도 내가 쓰면서 공부를 해야 의미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새롭게 다가온 부분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였다. 이순신 장군이 누구인가. 한반도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 아닌가. 단순히 위대하다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할 정도로, 우리 민족 역사 상 가장 이견이 없는 신화적인 존재다. 필생의 적들까지 존경하고 두려워했다는 우리 역사 최고의 영웅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다. 그를 '기록형 전문가'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고, 작가의 주장에 공감할 수밖에 없어 또 한 번 놀랐다.


이순신 장군은 기록형 전략가였다. 그의 일기는 한계를 뛰어넘고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데 기록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 주는 귀중한 유산이자 교훈이다. (중략) 특히 이순신 장군의 일기에는 세 가지가 주요하게 담겨 있다. 첫째로, 업무에 대해 정말 세세하게 작성했는데, 군영 운영의 실무를 맡았던 아전들의 이야기, 그들을 단속한 사례 등이 『난중일기』의 앞부분부터 다수 등장한다. 병사들을 통솔하고 또 그들의 일상을 보살핌과 동시에 엄한 군율로 다스리는 장면 등도 아주 생생하게 서술하고 있다. 개를 잡아먹은 병사에게 곤장형을 집행한 이야기는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얼마나 꼼꼼하게 기록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활쏘기 시합, 씨름 등을 묘사한 대목은 전장의 실제 일상을 전해 주는 아주 소중한 기록이기도 하다. 둘째로, 『난중일기』에 담겨 있는 또 다른 중요한 기록 유형은 회의 기록이다. 이순신 장군은 작전회의에서 어떤 내용이 논의되었는지를 일기에 남겼는데 그가 전략가로서 남다른 천재성을 발휘한 것은 이런 기록 습관과 관련이 있다. 회의를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앞에 닥친 문제의 핵심을 꿰뚫고 회의의 결론을 반추해 앞으로의 계획에 반영하는 일련의 과정을 일상적으로 유지해 온 것이다. 셋째로, 사람에 대한 기록 역시 풍부히 담겨 있다. 이순신 장군은 일기를 통해 영의정 류성룡, 도원수 권율, 경상 우수사 원균 그리고 임금인 선조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대화 기록의 본질을 보여 준 것이라 할 만하다.


기록해라!! 써라!! 적자생존!! 아주 지겹게도 들어온 말이었다. 기록을 잘 하면 어떤 점이 좋은지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나 역시 경험적으로 깨달은 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확 와 닿는 이유가 신기했다. 글쓰기를 잘 하고 싶어하는 나에게, 기록이라는 글감을 쌓아나가야겠다는 동기를 다시 한 번 불어 넣어주는 책이었다. 중후한 느낌의 다이어리를 펴서 품격있는 명품 만년필로 글씨를 쓰는 모습도 멋지겠지만, 수시로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꺼내어 기록하는 습관이라도 더 체계화시켜 나가야겠다.

keyword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