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 패배와 승리를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배움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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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불문율',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2021.4.17. KBO 리그, NC다이노스와 한화이글스의 경기. NC가 14-4로 크게 앞서고 있는 8회말 2아웃. 지고 있는 한화의 감독은 승부가 기울었다는 판단 하에 투수를 소모하지 않기 위한 목적으로 투수가 아닌 야수를 마운드에 등판시켰다. 마운드에 올라간 선수는 제구력 불안을 보이며 볼만 연속하여 세 개를 던졌다. 3볼 0스트라이크 상황. NC의 강타자 나성범은 가운데로 들어오는 공을 치기위해 배트를 휘둘렀고, 공은 빗맞아 파울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한화의 외국인 감독 수베로는 크게 화를 냈다. 크게 지고 있는 팀의 투수가 제구력이 흔들리고 있을 때는 타자가 공을 치지 말아야 한다는 야구의 불문율을 어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베로 감독의 분노를 목격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각은 달랐다. 제구력이 흔들리는 투수가 볼만 계속 던지게 되면 경기시간만 길어지고 점수 차이가 더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타자가 적극적으로 타격을 하여 경기 진행을 빠르게 하도록 돕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행동이라고 생각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야구문화에서는 나성범의 스윙이 오히려 상대를 돕기 위한 적극적인 배려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렇게 동일한 종목의 동일한 상황, 그것도 최고 수준의 경기력으로 경쟁하는 프로의 세계라는 동질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야구 선수와 우리나라의 야구선수는 완전히 다른 행동을 하고 있었다. 수베로 감독도 놀랐겠지만, 나성범과 우리나라 야구팬들 역시 많이 놀랐다. 야구의 불문율이라는 것이 나라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이번에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https://www.chosun.com/sports/baseball/2021/04/18/TRS272NUP5G3NJ35MCZ3WB3BFY/
야구라는 종목은 가장 많은 불문율을 가지고 있는 종목이라고 할 수 있다. 큰 점수차이로 앞서고 있는 팀의 선수는 번트를 대거나 도루를 시도하여 상대를 자극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플레이를 시도하는 경우에는 투수의 빈볼이 타자의 머리를 향해 날아올 수 있다. 불문율을 어긴 상대에게 보복을 하라는 좋지 않은 불문율까지 있는 것이다. 물론, 빈볼을 던진 투수와 이를 지시한 코칭스태프는 징계를 받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야구 선수들이 이런 방식의 불문율을 지켜야 한다는 무형의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교육적 관점에서 결코 바람직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스포츠를 가르치는 학교체육의 관점에서 스포츠맨십을 실천할 수 있는 바람직한 불문율, 또는 스포츠맨십 실천을 위한 명문화된 규칙은 교육적 가치가 크다. 스포츠의 좋은 가치를 경기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학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규칙들은 다양한 스포츠 종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규칙들을 종합하여 '자비 규칙(Mercy Rule)'이라고 부른다.
자비 규칙(Mercy Rule)
자비 규칙은 일반적으로 영어 'Mrecy Rule'로 표현되지만, 'slaughter rule', 'knockout rule', 'skunk rule' 등의 단어와 혼용되기도 한다(Wikipedia, 2021). 자비를 베푸는 관점에서의 규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방적으로 지고 있는 팀을 완전히 끝내버리는 잔인함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자비규칙은 패배하는 팀을 배려하는 성격으로 실천되지만 패배하는 팀의 패배를 더욱 강조하는 낙인이 될 수도 있는 양면성이 있으며, 승리하는 팀의 선수들이 개인적인 목표(예: 득점 기록 등)를 달성할 기회를 박탈한다는 현실적인 문제 등도 있기 때문에,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논리가 모두 타당성을 인정받는 끝없는 논쟁의 주제이기도 하다.
자비규칙을 찬성하는 측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승리를 이미 확보했을 정도로 압도적인 점수차이로 이기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탁월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계속 점수 차이를 벌리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는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압도적인 패배를 당하는 팀이나 선수는 자존감을 상실하고 수치심을 느끼게 되어 이후의 스포츠 활동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반대로 자비규칙을 반대하는 측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맥락이다. '압도적인 승리가 확실한 팀이 경기의 남아있는 부분동안 상대를 존중한다는 목적으로 경기를 대충 하는 행위'는 패자의 고통을 완화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패자의 수치심을 더욱 심하게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자비규칙은 이렇게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 적용을 공식화하기 위해서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다. 자비규칙의 적용 범위에 있어서도, 탁월함과 경쟁을 본질로 하며 기록과 상업성이 연계되어 있는 '프로(Proffesional)' 수준의 스포츠와 학생선수가 참가하는 스포츠 경기는 다른 맥락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교육적 관점에서 스포츠의 가치를 지키고 스포츠맨십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를 고민하며 연구해야 한다. 스포츠를 통한 교육의 효과를 기대하기 위해서, 종목별로 합리적이고 타당하여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자비규칙을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자비규칙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들
https://dailyutahchronicle.com/2019/11/21/college-athletics-need-a-mercy-rule/
스포츠에서의 '경쟁'에 대한 교육적 접근
스포츠의 본질은 경쟁이다. 경쟁의 대상은 기록이 될 수도 있고, 상대하는 선수 또는 팀이 될 수도 있다. 경쟁은 규칙 속에서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스포츠의 경쟁에서 승리한 선수들을 존중하며 그들의 성과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스포츠 문화를 만들어왔다. 우수한 선수와 팀은 역사가 되며, 역사는 전통이 되어 존중을 받게 된다. 하지만, 경쟁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모두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당한 방법이 아닌 편법을 사용하여 얻은 승리는 (그 비밀이 시간이 지난 이후에 드러나더라도) 가치를 인정받기 어렵다. 그래서 교육적 관점에서 경쟁을 어떻게 정의내려야 하는가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스포츠에서 존중받는 '탁월함'은 도전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가 있어야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면 다음과 같은 '존중받지 못하는 월드컵 득점왕'이 탄생할 수도 있다. 월드컵 조별리그에 참가한 축구팀 중 실력이 아주 부족한 A팀이 있다. B팀은 A팀을 상대한 경기에서 20-0으로 승리하였고, C선수가 10득점 10도움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20-0으로 승리한 B팀은 나머지 두 경기에서 0-2, 1-3으로 패배하였고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하였다. 대회의 최종 결과 7경기를 연속하여 승리한 D팀이 우승하였으며, D팀 소속의 E선수가 5득점, 3도움을 기록하며 대회 MVP에 선발되었다. 실력 차이가 많이 나는 팀과의 단 한 경기에서 10득점 10도움을 기록한 C선수는 대회 득점왕과 도움왕이 되었다.
위의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인정받게 되는 선수는 C선수일까 아니면 E선수일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E선수를 더 훌륭한 선수라고 이야기할 것 같다. 물론, 월드컵 축구대회 정도의 수준이라면 이 정도의 실력차이가 나타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국가 수준, 지역 수준, 특히나 학생선수가 참여하는 대회 수준이라면 이런 상황은 얼마든지 현실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사람들이 선수와 팀의 가치를 이야기할 때, 단순하게 기록의 숫자를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포츠의 경쟁은 승리와 기록이라는 단순한 결과를 넘어선 가치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적인 관점에서 타당한 경쟁 상황은, 경쟁의 결과를 '섣불리 예측 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누구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상황에서의 도전이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도전이라는 스포츠의 본질적 가치를 실천하고 있는 선수라면 누구나 박수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실제로, 올림픽과 같은 최고 수준의 경기에 실력과 관계 없이 도전의 가치를 인정받아 참가한 선수들의 최선을 다한 장면에서 우리는 큰 감동을 받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XGNKL9xDrI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경기의 내용과 결과에도 불구하고, 경기와 상대에 대한 존중이 느껴지지 않는 방식으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선수와 팀이 있다면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압도적인 승리가 예상되는 팀이 상대에 대한 존중 없이 자신의 기량을 과시하기 위한 방식의 경기를 고집하거나 상대가 모멸감을 느낄 정도로 상대를 비하하는 방식의 경기를 한다면 좋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경쟁을 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의 수준 차이라면, 승리가 예상되는 팀에서 패배가 예상되는 팀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경기를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상대팀을 존중하는 방식을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모든 상황에서 자발적 실천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스포츠에서 지향하는 '좋은 경쟁'이 이루어지도록 장치를 마련할 필요성이 있다.
스포츠는 본질적으로 경쟁이라는 요소를 핵심으로 내포하고 있다. 경기의 방법이나 규칙을 어떤 방식으로 변형을 한다고 해도, 경쟁이라는 본질을 벗어날 수는 없다. 스포츠에서 경쟁이라는 요소를 제거하는 순간, 더 이상 스포츠가 아닌 놀이가 되기 때문이다.
경쟁은 본질적으로 승리와 패배라는 전혀 상반된 결과 중 하나로 나타나기 때문에, 스포츠에 참여한 모두는 승리하는 경험 또는 패배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스포츠가 교육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큰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스포츠를 통하여 상대를 존중하며 승리하는 방법, 패배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학습할 수 있다. 우리 삶에서 맞이하는 다양한 상황들을 건강하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방법을 학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스포츠 참여 경험인 것이다. 따라서, 학교에서 스포츠를 다룰 때는 보다 교육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설계할 필요가 있다.
자비규칙이 필요한 이유(Sailors, 2010)
Sailors(2010)은 자비규칙의 당위성을 네 가지 맥락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째, 시간제한이 있는 스포츠에서는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경기가 종료되기 때문에 자비규칙을 고려하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시간제한이 없는 스포츠에서는 큰 점수차이로 승부가 결정됨으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예방하기 위하여, 한 팀의 우월함이 입증된 시점 이후에는 경기를 종료하는 규칙이 필요하다. 승리한 팀이 경기가 종료될 때까지 우월함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보다, 패배한 팀이 당하는 고통을 완화하는 것이 더 나은 판단이기 때문이다.
둘째, 팀 스포츠에서는 좌절감이 높아질수록 공격성이 드러나게 되어 부상의 위험이 높아지며, 지도자와 선수들은 전략적인 판단보다는 심판의 판단에 민감해지고, 팬들이 상대 팀을 조롱하기 시작하여 폭력이 발생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사회학적으로 좋은 행동보다는 나쁜 행동이 더 폭발적으로 확산될 수 위험성이 크다. 따라서, 팀 스포츠에서 스포츠맨십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자비규칙이 필요하다.
셋째, 스포츠 경기의 방식이 직접적인 경쟁인지 아니면 간접적인 경쟁인지에 따라 자비규칙이 필요할 수 있다. 육상, 양궁, 사격, 볼링, 골프 등의 스포츠는 다른 선수와의 경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적으로 기록과 경쟁을 하는 측면도 있는 '병렬(Parall)'적 성격의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목에서는 다른 선수와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기록 도전을 계속 할 수 있기 때문에 스포츠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자비규칙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상대와 직접적으로 경쟁하여 승자와 패자를 결정해야 하는 종목에서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도전을 이어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상대적 우월성을 직접적으로 경쟁하는 스포츠에서는 자비규칙이 필요하다.
넷째, 경기 외적인 조건의 차이에 따라 자비규칙이 필요하다. 장학금이나 진학 등의 부수적인 혜택이 있는 대회에서 경제적, 행정적으로 풍족한 지원을 받는 스포츠 팀과 그렇지 않은 팀의 참가동기에는 차이가 있다. 대회에 참가하는 누군가에게는 소속팀의 경기 결과를 넘어, 개인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가능한 많이 얻는 것이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스포츠 경기에서 선수들에게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하게 보장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대회의 성격에 따라서 자비규칙의 적용 여부는 신중하게 결정되어야 한다.
자비규칙 사례 - 야구
자비 규칙이 가장 활성화되어 있는 스포츠 종목이 바로 야구다. 야구는 경기력의 차이가 큰 경우에 경기의 진행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까지 도달할 위험성이 있으며, 수준 차이가 큰 팀간 경기에서는 사고로 인한 부상의 우려도 큰 종목이다. 동일한 수준의 팀간 야구 경기라고 하더라도 경기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한 팀에게 쏠리는 경우에는 극복하기 어려운 정도의 점수 차이가 나기도 한다. 야구는 시간제 경기가 아닌 1이닝 3아웃을 기준으로 경기가 운영된다. 3명의 선수가 아웃을 당하기 전까지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닝이 계속 진행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압도적인 실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팀이 1이닝 공격에서 100점을 내며 10시간 동안 계속 공격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큰 점수 차이로 지고 있는 팀이 더 이상 비참해지기 전에 경기를 끝내는 자비를 베푼다는 취지로 우리가 '콜드 게임(called game)'이라고 부르는 '득점 규칙(Run Rule)'이 명확하게 존재하게 되었다. 득점 규칙은 야구와 소프트볼 경기에서 특정 이닝까지 경기가 진행되었을 때의 점수차이를 기준으로 특정 시점에 경기를 종료한다는 규정으로, 국제대회를 포함한 대부분의 아마츄어 경기에서 명시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다. 이러한 규칙은 선수의 경기력을 기록으로 평가하는 스포츠의 특성 상, 기록의 가치를 왜곡시키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지지를 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많이 활용되는 자비규칙은 아니지만 야구 경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규칙을 적용하는 사례도 있다. 각 이닝 별로 최대 득점 가능한 기준 점수를 정하여, 해당하는 점수를 기록하는 팀은 곧바로 이닝을 종료한다. 이를 통하여 실력차이가 많이 나는 팀 간 경기의 점수차이를 처음부터 조절할 수 있다. 동일한 맥락에서 각 이닝 별로 타석에 들어설 수 있는 최대 횟수를 정하는 방법도 가능하다. 예를 들면, 한 이닝에서 한 타석만 들어설 수 있도록 규칙을 정해두면 아웃 카운트가 올라가지 않더라도 타자 일순하는 순간 해당 이닝이 종료되는 것이다. '타자일순 시 이닝종료(한 이닝에서 한 번만 타석에 들어설 수 있음)' 규칙은, 우리나라 학교현장의 체육 수업이나 교내 경기대회 '발야구' 종목의 규칙으로 활용되는 사례도 있어 비교적 친숙한 편이다.
야구 경기에서는 명문화된 자비규칙 외에도, 위의 KBO 리그 사례에서 이야기한 '불문율' 형식의 자비규칙들 역시 존재한다. 점수 차이가 크게 앞서고 있는 팀의 타자는 타석에서 번트를 시도하지 않으며, 주자 역시 도루를 시도하지 않으며 가능한 베이스에서 리드를 하여 수비를 자극하는 행동도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잘 모르겠지만, 미국의 야구 문화는 다른 듯 하다.) 크게 앞서고 있는 팀의 선수는 투수가 좋지 않은 공을 던진다고 하더라도 가능한 적극적으로 타격을 하여 경기의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미국의 경우에는 점수 차이가 현실적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정도로 크게 나는 경기의 후반부에 투수가 아닌 야수를 투수로 등판시키는 경우(이른바 'Mystery Pitcher')가 있는데, 이 때 상대 타자들은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지는 야수를 존중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타격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자비규칙 사례 - 농구
EDJBA(미국 동부지역 유소년 농구 연맹)의 농구경기에서는 점수 차이가 20점 이상이 되면, 앞서고 있는 팀은 3점슛 라인 안 쪽에서만 대인방어(Man-to-Man)를 해야 한다. 심판은 앞서가는 팀이 이 규칙을 위반하면, 바이얼레이션을 적용하고 상대 팀이 하프라인에서 공격을 시작하도록 해야 한다. 이 때 특별한 규칙이 하나 더 있다. 20점 차이로 뒤지고 있는 팀이 이 규칙을 활용하여 3점슛 라인 밖에서만 경기를 하려는 경우에 심판이 세 번까지는 구두로 주의를 주고, 이후에도 계속 동일한 방식을 고집하면 앞서고 있는 팀에게 3점 슛 라인을 넘어 하프라인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수비할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한다.
MHSA(미국 몬타나 주 고등학교 스포츠 협회)의 농구경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자비규칙을 적용하였다. 후반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40점 이상의 점수 차이가 있다면, 후반전(3쿼터) 경기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경기가 종료되는 시점까지 경기 시간을 멈추지 않고 진행한다. 3~4쿼터간 휴식시간, 경기 중 작전시간, 선수의 부상 발생 시를 제외하고는 경기 시간을 멈추지 않는다. 파울로 인하여 자유투를 던지는 경우에도 경기 시간을 멈주치 않는다.
IGHASU(미국 아이오와주 여자 고등학교 스포츠 연맹)도 비슷한 자비 규칙을 가지고 있다. MHSA와의 차이점은 후반전 경기시간을 멈추지 않게 되는 기준 점수 차이가 35점이며, 점수차이가 25점 이하가 되는 순간부터는 다시 일반적인 상황의 경기시간 멈춤 규칙을 적용한다는 것이다. 또한, 자유투를 할 때는 시간이 멈춘다는 것 역시 다른 점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사례 외에도, 농구경기에서는 '10점 이상의 점수 차이가 나면, 올코트 프레스 수비를 하지 않는다.', '큰 점수 차이로 앞서고 있는 팀은 속공(Fast Break)을 시도하지 않는다.', '큰 점수차이로 앞서고 있는 팀은 마지막 공격제한시간 동안 공격권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공격을 시도하지 않는다.' 등의 다양한 형태의 자비규칙이 적용되기도 한다.
자비규칙 사례 - 미식축구
NFHS(전미고등학교스포츠연맹)의 미식축구 경기에서는(각 주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다음과 같은 자비규칙들을 적용한 사례들이 있다. 첫째, 점수 차이의 기준에 따라 후반전(3쿼터) 이후의 경기에서 경기시간 멈춤 규칙을 적용하지 않고 경기 시간을 계속 흘려보내는 규칙이다. 둘째, 첫 번째 규칙이 적용된 경기의 후반전이 진행 중에 언제든지 지고 있는 팀에서 경기를 끝내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셋째, 최대 점수차이 기준을 정하여두고 이 점수 차이 이상으로 앞서는 팀은 다음 경기 기회를 박탈한다. 넷째, 큰 점수차이로 앞서고 있는 팀에서는 특정한(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공격전술을 사용하지 말야야 한다.
NCAA(전미대학체육협회)의 미식축구 경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자비규칙을 적용한 사례가 있다. 두 팀 간의 점수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경우에, 두 팀의 코치와 경기관계자가 협의하여 이후 경기시간을 단축하거나 경기를 그대로 종료하였다. 미식축구 경기에서는 경기규칙에 따라 앞서고 있는 팀이 경기종료 2분(120초)이 남은 시점에서 'Quaterback Kneel'을 할 수 있는데, 자비규칙의 맥락에서 앞서고 있는 팀 또는 지고 있는 팀이 마지막 공격권을 소유하고 있을 때 'Quaterback Kneel'을 하기도 한다.
자비규칙 사례 - 탁구
탁구 경기에서는 공이 테이블 모서리에 맞은 후 상대 선수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였을 때, 공이 네트에 맞고 살짝 넘어가 상대 선수가 대처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을 때, 득점한 선수가 상대 선수에게 미안하다는 표현을 하는 불문율이 있다. 또한, 한 선수가 일방적으로 앞서나가며 10-0 까지 점수가 벌어졌을 때는 앞서고 있는 선수가 일부러 서브미스를 하던지 실수를 하여 상대가 0점으로 패배하는 세트로 끝나지 않도록 배려하는 사례도 있다.
가비지 타임(Garbage Time), 경기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바람직한 것일까?
농구 경기에서 점수 차이가 크게 벌어져 더 이상 아무리 노력해도 경기의 승패에 영향을 주는 것이 불가능한 시점이 되면, 이후에 남아있는 경기 시간을 '가비지 타임(Garbage Time)'이라고 부른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의미없이 남아있는 '버리는 시간'이라는 뜻이고 실제로도 그런 의미로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가비지 타임이 되면, 양 팀의 감독은 우수한 역량의 핵심 선수들을 벤치로 불러들이고 경기에 출장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후보 선수들을 경기에 투입한다. 주전 선수들의 부상을 예방하고 체력을 비축하여 다음 경기를 준비하겠다는 목적의 선수 운용 방법이다. 이러한 장면을 보게되는 팬들 역시, 가비지 타임이 되면 팀 경기력에 큰 영향을 주는 선수들을 보호하고 후보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옳다고 공감하는 경우가 많다.
가비지 타임이 이렇게 이상적으로 운용된다면 경기는 아름답게 마무리 될 것이다. 주전 선수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밀려서 경기에 뛸 기회가 없는 후보 선수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도 가비지 타임을 만들어낼 때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다. 후보선수의 입장에서는 모처럼 찾아온 기회에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보여줄 수 있다는 동기가 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경기를 하게 된다.
아쉽지만, 현실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가비지 타임에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승리하는 팀을 존중하는 태도가 아닌 경우가 있다. 다음의 사례처럼, '깔끔한 승리'를 '찜찜한 승리'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잘못된 의지를 보여주어 팬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https://sportsworldi.com/view/20200114516431
경기에 몰입하여 최선을 다하다보면 어떤 시점에 본의 아닌 '가비지 타임'이 만들어질 수 있다. 시간의 소중함은 우리의 삶이나 스포츠 경기나 다르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쉬고 싶고 의미없는 시간이 될 수도 있지만, 스포츠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소중하지 않은 시간은 없다. 스포츠 경기를 하다보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순간이 찾아오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남아있는 시간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의미있게 사용할 것인가는 선택할 수 있다. 다음의 사례들처럼 승자와 패자 모두 버리는 시간을 의미있는 시간으로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장면이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10223500002
http://www.jumpball.co.kr/news/newsview.php?ncode=1065542461521440
스포츠의 본질적 특성인 '경쟁'으로 인하여 인간의 폭력성이 발현될 수 있기 때문에 스포츠는 교육적으로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고 패자는 좌절과 모멸감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구조라면 이러한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구조라면 스포츠는 사람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스포츠 역사에서 위대한 승자로 기록된 선수들 모두가 존경을 받지는 못하며, 반대로 기량은 부족했지만 존경을 받는 선수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스포츠는 경쟁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패배라는 불쾌함 너머에 있는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가치'들을 건강하게 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문화적 도구다. 스포츠는 사회적으로 가장 안전하게 경쟁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이며, 누구나 일상적으로 승자가 되었다가 패자가 되기도 하는 체험학습의 장이다. '스포츠를 통한 교육'의 진정한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학생들이 스포츠의 좋은 가치를 경험할 수 있도록, 더욱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체육 수업을 설계하고 학교체육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Sailors(2010). Mercy Killing : Sportsmanship and Blowouts.
박성주(2019). 스포츠 불문율 담론에 대한 고찰.
Wikipedia 'Mercy Rule' https://en.wikipedia.org/wiki/Mercy_rule
Baseball Reference https://www.baseball-reference.com/bullpen/Mercy_ru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