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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르르 Brr Mar 30. 2020

나는 내 잘못을 인정한 적 있나

잘못을 인정하는 쿨내의 결말



학생 때는 잘못을 하든 말든 선생님한테 혼나면 그만이었습니다.

성인이 되면 문제가 다릅니다.

 

 

저는 일을 좀 하기 시작한 뒤부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인색한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일 잘한다는 '소리'가 가슴에 훈장같이 박히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잘못을 인정할 경우 마치 그간의 공든 탑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이상한 압박감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로 번지면서 이렇게 됐죠. 내가 누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곪습니다. 대단히 큰 곤욕을 치렀으니까요. 30대 초반이었을 겁니다. 회사마다 법률 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부서가 따로 있습니다. 사업을 진행하며 계약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데 법률 검토는 필수입니다. 의뢰를 한 저는 당연히 그 부서를 믿고 검토 결과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습니다. 아주 사소한 조항이 누락되며 우리가 매우 불리한 상황이 됐죠. 가격을 협상하며 우위를 점해야 하는 발주처가 그 한 줄의 조항으로 칼자루를 뺏겨버린 것입니다.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이미 협력할 회사가 낙찰까지 된 상황이라 공고문을 수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관련된 회사는 이익과 직결되는 조항에 한 치의 양보도 없었습니다.

계약일은 다가오고 의견은 좁혀지지 않고 점점 애가 타기 시작했습니다. 더 늦어지면 안 될 것 같아 팀장에게 모든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한참을 듣던 그가 말했습니다.

 

"뭔 일을 그렇게 해?"

"네?"

"한 번 더 검토했어야지!"

"법률적인 부분은 제가 잘 몰라서..."

 

[분업화를 하는 이유가 업무의 효율을 위한 것이고 나는 법에 특화된 법무팀에 일을 의뢰한 죄 밖에 없으니 억울하다]

 

억울한 생각이 들면서 자존심까지 흔들거렸습니다.

 

내가 왜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내가 이런 욕까지 먹어야 하지?

 

저의 생각과 다르게 쏟아내는 말들이 어딘지 모르게 궁색한 변명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은 팀장의 화를 점점 돋우고요.

 

"그럼 법무팀 잘못인가?"

"네?"

"가서 따져. 책임지라고 해!"

"…"

"갸들이 일 똑바로 했으면 이런 일 안 생겼을 거 아냐!"

"…"

 

돌아서면서 찝찝한 기분을 토해낼 길이 없습니다.

법무팀 담당자를 찾아가 따졌습니다. 좋은 말이 오갔을 리 없죠. 이 상황을 어떻게 할 것이며 책임지라고. 그 직원은 나의 의뢰에 최선을 다했고 오히려 한 번 더 검토하지 않은 나의 잘못이라 열을 올렸습니다.

 

서로가 언성이 높아지던 때 옆에서 듣고 있던 법무팀장이 가세했습니다. 일이 커졌습니다.

호기롭게 출발했던 담당 직원과의 관계는 맞짱 구도로, 급기야 양쪽 부서 팀장들 간 싸움으로 번졌습니다. 다 같이 잘해보자 시작한 일이...

업무, 평판, 신뢰, 사람까지 다 잃게 생겼습니다.

일이 잘못될까 걱정되면서 겁이 덜컥 나자 누구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그제야 제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많이 늦었죠.

어떤 상황이 됐건 업무의 책임자는 저였습니다.

법무팀은 그 일에 협조한 것일 뿐. 설사 협조한 부분이 결정적이었다 해도 사태를 해결하는 접근 방식과 태도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어떻게든 해결하겠다는 마음이 보인 걸까요. 팀장님이 달라졌습니다. 방관의 캐릭터가 사라지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적극적인 파이터로 돌변했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그도 책임을 면치 못하니 팔 걷고 나선 게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람들도 많기에 저로서는 여간 감사하고 죄송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업체 사장님을 불러 크게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계약을 진행하고 원만하게  마무리 지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저는 애간장 타는 일이었어도 산전수전 다 겪은 팀장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처음도 끝도 결국은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팀장님은 잘못에 대한 인정보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던 제 모습이 탐탁지 않으셨던 겁니다. 부끄럽고 창피한 순간이었죠.

 

나의 책임이라고 공언해버리면 일이 잘못됐을 때 돌이킬 수 없는 타격(승진, 손해배상 등)을 받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런 저의 걱정과 다르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회사 전체를 놓고 보면 그런 일은 1년에 수도 없이 일어납니다. 사안에 따라 경중이야 있겠지만 해결된다면 크게 문제 되지 않죠.

 

잘못은 인정하는 게 빠른 길입니다.

촌각을 다투는 일인 경우 해결 방법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면 잠시 면피라는 달콤함을 맛볼 수 있지만 결국 더 큰 덩어리로 돌아와 나를 누릅니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완벽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그의 진가가 드러나죠. 인성과 능력, 태도까지. 더 큰 신뢰는 그럴 때 생깁니다. 이는 실적과 평판에 그대로 연결돼 나의 위치를 올리거나 내립니다.

 

며칠 뒤 법무팀 담당자로부터 전화 한 통이 왔습니다. 죄송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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