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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의 맛

허는 찌르라고 있는 것

by lqpa


뻔한 결말이 그려지는 지루한 영화.

인내심을 가지고 근근 버티던 작품이

마지막에 <훅>하고 허를 찌르면

늘어졌던 지루함은 금세 잊힙니다.

반전의 매력.

직장이라는 조직에서 오랫동안 농익은 상사에게 유쾌한 반전을 선사하는 부하직원은 자랑거리로 급부상합니다.

내가 기억하는 반전의 끝판왕이 있습니다.

사내 한 골프 모임을 관리했던 나는 모두가 하기 싫어하는 하꼬 총무였습니다. 라운딩 예약부터 참여자들의 동선과 식사 후 대리기사까지 챙겨야 하는 정말 지옥 같은 자리였죠. 가장 미칠 노릇은 단연 약속 펑크. 접전 끝에 잡아 놓은 황금시간대 부킹에 열외자 발생은 마치 나의 잘못처럼 되었고, 회장(부장)에게 욕먹기 일쑤였습니다. 대타를 구하는 일은 더욱 환장할 노릇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시간이 된다는 구원자가 등장했으니 이름하여 "임원"분 되시고.

상황을 간파한 무리들이 냄새를 맡고 끼어달라며 보채는 웃기는 상황까지 연출되면서 그 "임원"을 모시려는 물밑 작전이 벌어집니다. 동선 체크와 계획까지 본인이 직접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많을수록 저는 나쁠 게 없었습니다.

드디어 라운딩 데이.

나는 거주지 주소에 의거 짜인 동선을 따라 차를 끌고 "임원"을 모시러 갔습니다. 가기 전, 중간에 팀장급 한 명을 태웠는데 그는 평소에 사내 정치는 고사하고 나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그렇게 알고 있었기에) 사람이었습니다. 모임도 회비를 걷으니 어쩔 수 없이 참석한다는 불평러였구요. 임원과 동석하는 차량 탑승이 쉽지 않겠구나라는 나의 걱정은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는 그를 보며 깔끔하게 정리됐습니다.

그는 "임원"이 주로 본다는 신문 4종을 뒷좌석에 가지런히 깔고, 그 옆에 헤이즐넛 커피가 담긴 보온병과 생수 한 통을 내려놓았습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장면에 그의 얼굴 한 번, 뒷좌석 한 번을 번갈아보던 난 머뭇거리며 물었습니다.

"부장님이 알려주셨어요?"

"뭘"

벙쩍은 내 눈동자가 뒤쪽을 힐끔거리자 한마디 툭 던지더군요.

"아, 저거? 기본이지 이 사람아"

기본...

신세계 같은 장면이 그에게는 기본이었습니다.

옆구리 친 반전이 놀랍고 흥미로웠습니다. 발톱을 말아 넣은 맹수가 따뜻한 햇살 밑에서 분홍 혀를 홀짝이는 고양이 얼굴을 하고 <나는 맹수가 아니 야옹>하는 것 같았습니다.

끝일까요? 진짜 어퍼컷은 따로 있었습니다.

탑승한 임원이 신문 4종과 커피에 놀라 방실거릴 때 그는 운전 중인 나를 곁눈질하며 말했습니다.

"이거 000 과장이 다 준비했습니다."

하아...

정확히 계획된 멘트.

치밀한 시간차로 파고들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기습.

임원은 당장이라도 '넌 감동이었어'를 부를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 표정이 궁금했던 나는 또 그새를 못 참고 후방 거울 속 그의 얼굴을 보고 말았죠. 좋습디다. 므흣 거리는 안면 위 자글거리는 근육들. 운전하느라 고생인데 언제 이런 것까지 준비했냐며. 신문을 펼치고 커피를 마시는데 내가 준비한 것도 아니면서 왜 그리 뿌듯하던지. 조수석에 앉은 팀장이 내 표정 읽고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오물거렸습니다. 운전대를 틀어쥐지 않으면 당장 문을 열고 뛰어내려야 할 것 같은 오글거림이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그게 아니고요…

범인은 옆에 앉은 팀장입니다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마땅히 받아칠 적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웃었습니다. 팀장은 창 밖을 지그시 바라보다 사이드미러 안에서 만난 내 눈에 느끼한 윙크를 날렸습니다. ㅅ.ㅂ.

반전은 한 번 더 있습니다.

훗날 '임원'이 그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알도록 했으며, 공을 후배에게 먼저 돌렸다는 품성 지수까지 전부 다 챙겼다는 사실입니다.

선수죠. 그 뒤로 팀장은 임원들이 부르는 자리에 자주 불려 갔고 유쾌한 유머와 밀당력으로 가는 곳마다 초토화를 시켰다는 후문이 들렸습니다.

얼마 뒤 승진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보였습니다.

나는 그를 축하하며 생각했습니다.

반전도 경쟁력이면 하나쯤 챙겨뒀다 제때 터뜨려야지.

우리, 반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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