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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착각

자아 과대평가의 말로

by lqpa

사람마다 가진 재능의 결이 다릅니다.

같은 조건의 업무도 더 빨리 더 좋은 성과를 내는 사람이 있죠.

회사는 생산성이 좋은 직원을 선호합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가 가성비를 따지는 것은 의무입니다. 대상이 무엇이든 투자 대비 결과가 좋다면 환영이죠. 좀 인간적이지 않은 것 같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월급을 받는 사람으로서 서둘러 현실을 직시했습니다.

성과를 잘 내는 직원은 앞으로 치고 나갑니다. 한계를 시험하듯 몰려드는 일감에 숨을 헐떡일 법도 한데, 잘 해냅니다. 경쟁자뿐만 아니라 그 직원을 둘러싼 여럿이 위협을 느낄 정도의 남다른 클래스를 보여주면, 가파른 인정을 받습니다. 어느새 저만치 가 있는 그. 여기저기서 찾고 남의 하루까지 다 끌어다 쓸 것 같은 대세가 주욱 이어지면 그에게 승진이든 표창이든 여러 형태의 보상이 따릅니다.

여기서부터 착각이 유혹합니다.

'내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간다'

상당수가 빠지죠.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사람들을 무시하는 언행도 흘립니다. 그러다 자기가 없어도 회사가 멀쩡히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대다수가 고꾸라집니다. 유효기간이 꽤 긴 특별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말이죠.

조직은 크든 작든 분업화를 기본으로 합니다.

1평 남짓한 곳에서 혼자 밀가루 반죽을 하고 뜨거운 불판 위에 부어 풀빵을 굽는 1인 기업이 아닌 이상 단독 플레이는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헛발질 한 번에 카메라 셔터 값으로 수 천만 원을 버는 세계적인 축구스타 호날두도 그에게 공을 패스한 동료가 있어 골을 넣습니다. 반대편 축구 골대에서 출발해 상대 선수 10명을 홀로 제치고 골망을 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는 탁월한 능력은 인정하나 처음도 끝도 팀이 있기에 승리하고 그가 발롱도르를 거머쥘 수 있습니다.

일을 착착 해내는 성취감에 빠져 미친 듯이 일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끝처리가 뭉툭하면 오지랖이었겠으나 다행히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지 많은 일감이 몰렸습니다. 그게 바람직한 현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좋은 것이라 여겨 이 한 몸 불살랐습니다. 엮이지 않은 사업이 없다 보니 하루 종일 회의에 불려 다녀도 '인정' 받고 있는 것 같은 묘한 매력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습니다.

이제 내가 없으면 우리 부서 아니, 우리 회사 업무가 안 돌아갈 것이라는 착각의 정점에 이른 날, 보도블록을 잘못 밟아 인대 2개가 끊어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통증보다는 발목이 따로 돌아 수술이 불가피했죠. 대놓고 <000이 없으면 어떻게 하냐>는 팀장님 걱정이 그토록 달콤하게 들릴 수 있을까요. 딱 일주일만 기다려달라 수술 잘 받고 올 테니 걱정 마시라 했건만. 돌아와 보니 모든 일은 완벽하게 진행되었고 걱정했던 행사까지 잘 끝났습니다. 아주 자알.

나는 수술받고 침대에서 쉬다 왔는데 왜 서운했을까요. 내 옆에서 지원사격을 하던 직원들이 메인이 되어 받는 칭찬이 마치 내 것을 가로챈 것 같은 기분은 뭐였을까요. 착각 한 번 세게 빨고 나타난 환각 증상?!

일 좀 한다는 소리가 돌면 그것을 이용하려는 무리도 있습니다. 업무 핑퐁이라도 좋습니다.

잘 해내서 좋은 결과로 돌려주면 한 두 번은 바라지 않고 해 줄 수 있습니다.

'캬하, 역시 000은 다르다'

이런 소리 들으면 처음에는 신이 납니다만 갈수록 이상한 형태로 왜곡됩니다. 일도 잘하는데 마음까지 착한 나는 역시 완벽해. 스스로에게 최고 평점을 주며 금메달이라도 받은 것처럼 기뻐하던 것도 잠시, 그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것과 무엇보다 제대로 이용당한 거란 사실을 알게 되면 약기운 떨어진 정신과 육체만 남아 이리저리 흐물거립니다. 치유에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는 전적으로 나의 몫이죠.

혼술로 허공에 삿대질까지 하다 보면 말라비틀어진 단무지가 꼭 나처럼 보이는 순간이 한 번은 옵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지들이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이번에는 술로 상심한 맘을 적시면서 지난 나의 눈부신 활약을 주마등처럼 밀어보냅니다. 이어 그것들은 그저 누구나 할 수 있는, 다만 내가 조금 더 했을 뿐인 그냥 <일>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회사는 세계 최강의 천재가 와도 그가 그만두면 다른 천재를 쓰면 그만입니다. '내'가 없어도 회사는 돌아갑니다. 어쩌면 없어서 더 잘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간 복잡한 정보를 꿰뚫고 있어 후임자가 적응할 때까지 약간의 더딤은 있을지언정 우리가 없다 해서 회사는 절대 멈추지 않죠.

그 착각이 멘털을 갉아먹기 전, 마인드 세팅을 새로고침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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