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업무가 기회인 이유
무게감 없는 일이라 상처받은 마음에게
남의 떡은 이상하게 커 보입니다.
같은 색도 남의 것은 어딘가 모르게 곱고 윤이 나죠.
심지어 맛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내 손에 든 떡은 왜 이 모양 이 꼴일까요.
<기획>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부서는 핵심이라 할 만합니다.
사업의 총괄자로서 전체를 아우르는 힘을 가진, 정보가 그득한 곳이죠. 어찌나 멋져 보이던지 너무나 가고 싶었더랬죠. 아이디어를 내고, 도출해 구체화하고, 예산을 짜고, 기간을 계획하고, 타 부서와 협력해 진두지휘하며 짠하고 완성하는 프로세스. 생각만 해도 커리어 뚝뚝 떨어지는 환상의 샐러리맨 모습이었습니다.
반면, 처음 들어간 부서에서 내가 맡은 업무는 지루하고 단조로운 반복 그 자체였습니다. 농익은 경험자가 아닌 이상 주어지는 일의 대부분이 그렇죠. 조직이 클수록 맡은 역할은 전체의 일부가 맞습니다. 일정 시간만 투입하면 결과가 예측되는 뻔한 일. 재미는 고사하고 '이런 일을 하러 여기 온 게 아닌데'하는 자괴감까지 듭니다.
어느 날, 입사 동기가 오매불망 그리던 기획부에 들어갔습니다. 커피 한 잔을 하는데 컵을 들고 있는 그의 손가락이 멋져 보였습니다. 하늘에 있는 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학교를 나온 것 같았습니다. 촌스럽던 사투리는 매력이 넘치고, 가끔 창밖을 내다보는 처진 눈꼬리는 우수에 찬 지성미였습니다. 깎다만 수염은 기획자만 가질 수 있는 느낌이오, 입가에 낀 백태마저 더럽지 않은 아름다움이었습니다.
부서에 대한 프라이드에 격한 공감으로 연신 '맞어맞어'를 외쳐주던 커피타임은 대리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죠.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이 시간이 갈수록 친구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턱 끝까지 내려오는 다크서클에 초롱하던 눈빛은 상한 동태가 되고, 생글거리던 얼굴은 사색이 되어 말 걸기도 미안할 지경이었습니다. 무언가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하는 '기획' 이 처음에는 좋았지만 바닥이 드러나며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어버린 것이죠. 역할을 못하면 밀리고 나중에는 기획부서 내에서도 단순 업무만 맡게 되더라는 겁니다. 명색이 기획부에서 말이죠. 오히려 그 부서에 안 가니만 못한 상황이 되면서 맘을 다치고, 밥 먹듯 하는 야근으로 몸은 망신창이가 되어 부서를 옮겨야겠다는 얘기까지 하게 된 것이죠.
그를 부러워하던 저는 나의 소명인 단순, 반복 업무(금액 확인-도장 쾅-입금 실행)가 답답하고 견딜 수 없어 시스템화해볼까라는 계획에 박차를 가합니다. 해묵은 답습을 당연시 여기고 변화를 반기지 않는 부서의 고질적 성격을 감안할 때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저항은 크지 않았습니다. 팀장님은 작은 프로세스만 개선해보려던 나의 소박한 꿈을 오히려 좋은 기회라 여기고 힘을 실어줄 테니 전체 프로세스를 싹 다 바꿔보라는 대참사를 벌입니다.
코딩 몇 줄이면 될 거란 기대는 완벽한 오산이었습니다. 고민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죠. 먼저 전산화를 구체화할 수 있는 프로그래머가 필요했습니다. T/O를 줄 테니 사람은 알아서 뽑으라는 인사부 말에 채용 공고를 위한 작업부터 해야 했습니다.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화면 구성을 위해 그들과 야근하는 일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기획'이 별게 아니었습니다. 일하는 순간순간 모든 과정이 전부 기획이었습니다. 끽해야 한 달을 예상했던 작업량은 1년을 가볍게 넘기고 초안이 완성되자 유사한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타 부서의 자문 의뢰가 빗발치는 진풍경까지 벌어집니다.
단순 업무는 더 이상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고도의 집중과 몰입이 필요한 일이 되어 창의와 개선의 맨 앞에 선 나는 '나를 따르라'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죠. 단순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질 만큼 힘에 부치자 이런 일을 1년 내내 하는 기획부에 간 친구를 부러워했던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그 안에서도 단순 반복이야 있겠지만 태생이 '만들어내야 하는' 환경은 분명 압박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오히려 마음만 먹으면 단순함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는 게 복이었습니다.
그쯤 되자 인사철마다 다가오는 실적 기록에 더 이상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신사업을 발굴하고 새로운 것을 기획하는 사람이 적어내던 당연한 자랑거리를 능가해 더 짙게 티 낼 수 있는 풍성한 일이 생겼으니까요. 조금만 달라도 드라마틱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이 얼마나 훌륭한 먹거리입니까. 20억이라는 거대 예산을 순삭 하고 작업에 참여한 여럿은 공로상을 싹쓸이합니다.
지금도 그 시스템은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수 십 번 업그레이드가 됐고 부서 업무의 대부분이 그 안에서 돌아갑니다. 화려하고 뭔가 있어 보이는 업무도 막상 열어보면 겉만 번지르르한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 맡은 나의 일이 초라하고 보잘것없을 이유가 없죠. 느긋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어딘가 있을 구멍을 찾아 메운다면, 단순한 업무야말로 나의 능력을 알차게 보여줄 절호의 찬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