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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ul 29. 2024

80년 생을 8년으로 압축해도 아쉽지 않을 것 같은데

<나의 해방일지>에서 찾은 세 번째 해방

나의 해방일지 6화  중,

 #45 구씨네(밤)

미정 하루 24시간 중에 괜찮은 시간은 한… 한두 시간 되나. 좋은 시간도 아니고 그냥 괜찮은 시간이 그 정도. 나머진 다. 견디는 시간.

구씨…!

미정 어려서부터 그랬어요. 신나서 뛰어노는 애들 보면, 그 어린 나이에도 심난했어요. ‘뭐가 저렇게 좋을까. 난 왜 즐겁지 않을까…’

구씨

미정 먹고 자고 먹고 자고 … 쓸데없이 허비되는 시간이 왜 이렇게 길까… 80년 생을 8년으로 압축해서 살아버려도 하나 아쉬울 것 없을 것 같은데

구씨

미정 하는 일 없이 지쳐…

구씨

미정 그래도 소몰이하듯이, 어렵게, 어렵게, 나를 끌고 가요. ‘가보자. 왜 살아야 하는지, 왜 그래야 되는지 모르지만, 사는 동안은 단정하게, 가보자.’ 그렇게… 하루하루… 어렵게, 어렵게… 나를 끌고 가요…

구씨 …(되뇌는) 소몰이…(괜히 딴소리) 본 적 있나 부네?

미정 어려서 몇 번.

구씨가 미정을 보다가 일어나 냉장고로 가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름이 든 봉지를 꺼내, 미정 앞에 내려놓고 도로 소파에 앉는다.

—————

 최근에 무언가에 홀린 듯 구매한 책이 있다. 파울로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였다. 최근 이런저런 일로 우울해하는 나를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유튜브 알고리즘이 ‘요즘따라 인생이 우울한 당신이 꼭 봐야 하는 영화’라는 제목의 영상을 피드에 띄웠다.

좋아하던 영화리뷰 유튜버이기도 했고, 썸네일 속 자막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당신의 남은 수명은 7일입니다.” 어떤 이유로 저 여자의 삶은 7일밖에 남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남은 7일을 저 여자는 어떻게 보낼까. 궁금해졌다.

 영화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삶에 지독한 회의감을 느낀 여자 주인공 베로니카는 수면제 두통을 내리 삼키며 자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구조되었고, 자살기도라는 이유로 빌레트라는 정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혼수상태에 있던 베로니카가 깨어나고 나서 의사에게 들은 말은 수면제 과다복용의 부작용으로 인해 심장에 무리가 갔고, 이로 인해 남은 생이 일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처음에는 자살 시도가 실패한 것에 분통을 터트리며, 남은 일주일이 빨리 지나가길 소망한다. 하지만 그 일주일 동안 빌레트에 입원한 환자들 몇 명과 교감을 나누게 되고, 그들과의 시간은 베로니카에게 생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베로니카는 살고 싶어 졌다. 처음에는 숱하게 많이 남은 날들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던 베로니카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오로지 일주일의 여생뿐이라고 선고받았고, 죽음을 목전에 두자 다시 삶을 갈망한다.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하루였지만, 살 수 있는 마지막 날의 하루는 그녀에게 너무나도 소중했다. 그래서 그녀는 정신병원 빌레트를 탈출한다. 영화의 마지막 반전은, 실은 그녀의 심장은 아주 멀쩡했다는 것이다. 생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그녀를 보며, 빌레트의 의사는 그녀에게 남은 생이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친 것이었다. 사람들이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오히려 살고 싶어 하는 욕구가 생겨나는 것을 기대하며 그녀에게 거짓말을 친 것이었다. 그것을 모른 채 정신 병원에서 탈출한 베로니카는, 매일 눈을 뜨며 그녀에게 또 하루가 주어진 것을 축복으로 여기며 하루하루를 귀하게, 그리고 감사하게 살아갈 것이었다.

 영상의 마지막, 이 영화는 파울로 코엘료의 동제목 책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언급이 나왔다. 언제나 책을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면, 책 쪽이 훨씬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편이기에 책 내용이 궁금해졌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영상을 통해 대략 파악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더 섬세하고 자세하기 표현했을 책이 궁금해졌다. 술을 먹고 나서 몽롱한 정신에 충동구매를 하듯, 무언가에 이끌리듯 영상을 끄자마자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구매했다.

 책을 한달음에 읽어내라고 나서는 꽤나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똑같은 베로니카였다. 그녀를 스쳐간 시간이 남기고 간 상처와 아픔도 그대로였고, 그녀의 가치관과 사고방식도 똑같았다. 달라진 조건이라고는 ‘남은 시간’뿐이었다. 어차피 죽으려고 했던 목숨인데 남은 생이 삼십 년이 남든, 삼일이 남든 달라질 게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베로니카도 처음에는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인한 죽음에 실패하자 아쉬워하며 울분을 터트렸다. 그러나 결국에는 삶을 갈망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삶과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삶과 죽음을 대하는 베로니카의 태도는 ‘그녀이기 때문에’ 나오는 태도는 아니었다. 놀랍게도 전쟁, 전염병, 기근, 학살 등 생사를 오가는 큰 사건들이 발생하면 그 지역의 자살이나 우울증이 급격히 감소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왜 그럴까. 왜 사람들은 본인의 삶에 선택권이 있을 때는 죽음을 갈망하면서, 죽음 앞에 놓였을 때는 오히려 그 삶을 갈망하게 될까. 베로니카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니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하는 걸 뒷걱정 없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7일이 주어졌고, 그 7일이 지난 후에는 번거롭게 생을 끊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지겨운 삶을 끝낼 수 있는데 말이다.

 베로니카의 삶에 대한 태도 변화에 대한 고찰의 불씨가 내 삶으로 옮겨왔다. 문득, <나의 해방일지> 속 대사가 떠올랐다. 드라마 마지막화까지 정주행 하고도 머릿속을 맴돌던 대사. 대본집을 읽을 때는 생각에 빠져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던 그 대사.

 ‘80년 생을 8년으로 압축해도 하나 아쉬울 게 없을 거 같은데’

 <나의 해방일지>의 대사들 중 가장 공감이 갔던 대사였다.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 속 염미정에게서 내 모습을 봤던 순간 중 하나였다. 80년 삶을 8년으로 압축하는 게 뭐야, 8일로 압축한다고 해도 하나 아쉬울 게 없었다. 내가 먼저 삶을 저버리는 선택을 할 생각은 없지만, 모종의 이유로 인해 내게 남은 삶이 며칠밖에 안 남았다고 해도 크게 아쉬울 게 없었다. 괜찮은 대학, 안정적인 직장, 부족하지 않은 집안. 남들이 보기에는 남부럽지 않은, 평탄해 보이는 삶을 살았지만 그 속 허무함에 허덕이던 베로니카.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조용하게, 단정하게 본인의 삶을 착실하게 잘 살아가고 있어 보이지만 실은 삶에 큰 미련 없이, 하루하루를 소몰이하듯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염미정. 전혀 다른 환경 속의 두 인물이지만, 그 두 인물 속 내가 보였다. 삶의 이유가 희미해진 채 하루하루를 어렵게 이끌어가고 있는 염미정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의 나지만, 베로니카처럼 나도 죽음 앞에서는 삶을 갈망하게 될까. 밝아오는 아침 햇살을 신이 내려준 보너스 타임, 선물처럼 여기며 감사할 수 있을까.

 생각이 또 한 번 새로운 곳으로 튀었다. ‘Memento mori.’라는 말이 불현듯 생각났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생이 영원할 거란 생각을 버리고, 오늘 하루가 내게 주어진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라는 의미를 담은 말. 염미정과 베로니카 모두 생과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둘 다 죽음에 대한 자각은 있었지만 그 끝이 베로니카는 생에 대한 감사였고, 염미정은 또 수고스럽게 끌고 가야 할 내일이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둘의 차이점은 ‘행동’의 여부였다.

 베로니카는 빌레트라는 정신병원 생활을 하며 다양한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이 말하는 ‘비정상’이라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사람들이 비정상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실은 정상일 수도 있다고. 오히려 이들이 자신의 삶에 더 솔직한 이들이 아니었을까. 이들의 감정을 비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비정상과 정상에 대해 본인의 판단을 내려놓는다. 본인에게 한계 지어 놓았던 정상과 비정상의 틀에서 해방되며 자유를 느낀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상적이었던 삶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다. 반면 염미정은 사람들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는 자신을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며, ‘정상’인 사회 속에서 비정상인 자신을 욱여넣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세상이 만들어낸 정상과 비정상의 규범 속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행동하지 않은 채 순응하고, 체념했다. 나중에서야 ‘해방클럽’을 통해 본인의, 그리고 세상의 틀에서 해방되려고 행동했고, 그 행동을 통해 조금씩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것들로부터 해방감을 느끼며 조금씩 행복에 다가선다.

 여기까지 고찰을 마치고도 여전히, 삶은 내게 너무 사랑스럽고 오래도록 이어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삶의 태도에 대한 생각 변화는 있었다. 지금 보내고 있는 오늘이 나의 마지막 하루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만약, 마지막 하루였다면 내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살아보고 싶은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 살아보고 싶은 삶을 위해 나는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오늘이 마지막이었다면, 작은 행동일지라도 살아보고 싶은 삶을 위한 노력을 할 수 있었으니 여한이 없을 테다. 그리고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이 아니었더래도 그 작은 행동들이 모여 언젠간 내가 바라는 삶으로 데려가주지 않을까.

 <나의 해방일지>를 통해 깨달은 나의 세 번째 해방은, 삶에 대한 체념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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