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속 찾은 네 번째 해방
현아 (E) 어느 지점을 넘어가면 말로 끼를 부리기 시작해. 말로 사람 시선 모으는 데 재미 붙이기 시작하면… 막차 탄 거야. 내가 하는 말 중에 쓸데 있는 말이 하나라도 있는 줄 알아? 없어. 하나도. 그러니까 넌 절대로 말로 끼 부리기 시작하는 그 지점을 넘지 마. 웬만하면 너는 안 넘었으면 좋겠다. 정도를 걸을 자신이 없어서 샛길로 빠졌다는 느낌이야. 너무 멀리 샛길로 빠져서 이제 돌아갈 엄두도 안 나.
그윽하게 미정을 보는 현아.
현아 (E) 난, 니가, 말로 사람을 홀리겠다는 의지가 안 보여서 좋아. 그래서, 니가 하는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귀해.
사회생활을 하는 나를 돌이켜봤을 때, 나는 소위 말하는 ‘진지충’에 가깝다. 마음 터놓고 친한 사람들에게는 꽤나 익살스러운 모습이 많이 나오지만, 속마음을 터놓을 만큼 친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일 때가 많다. 지금 부서 사람들과도 함께한 지 1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유쾌한 분위기의 가벼운 이야기를 할 때면 덩그러니 놓여있는 보릿자루 한 가마가 되곤 한다. 깔깔 대며 마냥 즐겁기만 한 대화보다는 상대방의 일상이나 가치관, 생각을 나누는 잔잔한 대화를 더 좋아한다. 차분히 상대방에 대해 알아가는 1대 1 대화는 그럭저럭 잘하는 편이지만, 여러 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말의 맛을 살리며 말로써 유쾌하게 분위기를 띄우는 것에는 영 소질이 없다.
요즘 뭐가 유행이니, 누구가 이랬다더라 저랬다더라 하는 이런 가십거리에 별 관심이 없어 스몰토크에 취약하다. 게다가 낯을 가리는 내성적인 성향에 부끄러움도 많이 타고, 넉살이 좋지도 않은데 거짓말이나 마음에 없는 말도 잘 못하는 성격도 크게 한 몫하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편하지 않은 사람들과 말을 나누는 상황은 언제나 고역이었다. 사소한 일상을 나누는 가벼운 말이든, 업무 상 나누는 말이든, 심지어 ‘주말 잘 보냈어?’하는 가벼운 안부인사마저도. 불편하게 노력할 바엔, 혹은 잔뜩 경직된 머리가 상대방에게 실례되는 말을 내뱉을 바엔 그냥 보릿자루 신세를 택하게 된다.
그래서 말을 잘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즉석에서 논리 정연하게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사람, 유쾌한 말로 분위기를 풀어가는 사람, 그저 스쳐 지나가듯 보내는 안부인사말에도 자연스러운 여유가 느껴지는 사람. 말하는 것에 자체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그중 제일 부러웠던 건 그 사람의 말로 인해 딱딱했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풀리고, 그 사람의 말이 매력포인트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걸 못하는 나는 그런 사람들이 차려준 밥상에 그저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방청객 모드로 웃어주거나, 맞장구 쳐주는 게 다였다. 그러면서 마음 한 구석에는 저들의 사회성 있는 말솜씨에 대하여 언제나 부러움이 있었다.
그러던 중 본 나의 해방일지 대본집 속 현아의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말로 사람을 홀리겠다는 의지가 안 보여서 좋다는, 그래서 네가 하는 말은 한마디 한 마디가 귀하다는 그 말이. 직장에서 선배들이 잘 갈고닦은 사회생활 스킬을 발휘하며 상사들의 비위를 잘 맞추며 분위기를 풀어줄 때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있던 내게, 어색한 사람들과 있을 때는 열심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던 내게, 어쩌면 사회성이 부족한 건 아닐까 고민하던 내게 해주는 위로 같았다. 현아의 대사에 위로를 받으며, 내게 말의 의미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사람마다 말의 의미는 다를 수 있지만, 내게 말은 마음과 생각을 담아내는 그릇이었다. 형체가 없는 마음과 생각은 어떤 말로 담아내느냐에 따라 상대방에게 전해지는 의미와 울림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마음과 생각에 알맞은 크기와 모양의 그릇을 골라 상대방에게 전해주는 것. 담아낼 게 없으면 그릇을 꺼내지 않았다. 담아낼 건 보잘것없지만 크고 화려한 그릇을 꺼내 내용물을 과하게 꾸며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담아낼 것에 꼭 맞는 그릇을 귀하게, 신중하게 고를 뿐이었다.
애초에 내게 말은, 누군가의 환심을 사거나 나의 이득을 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유창한 화술을 가진 사람들은, 어딜 가든 분위기를 유하게 만들어주고, 사회생활을 잘한다. 그런 사람들을 막연하게 부러워했던 나를 돌이켜본다. 내가 진정 지켜나가고 만들어나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말이 담고 있는 마음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걸 잊고 지낸 건 아닐까.
투박하더라도 진심을 귀하게 담고 내 말이 좋아졌다. 말로 끼를 부리고 싶을 만큼 좋은 사람이라면, 말로 홀리고 싶을 만큼 욕심이 나는 상대라면 달콤한 말로 구슬리기보다는, 그만큼 귀한 마음을 키워나가는 게 내게는 더 맞는 방식이었다. 아무리 플레이팅이 화려하고 그릇이 예쁘더라도, 음식점을 다시 찾게 만드는 것은 음식의 맛이었다. 그런 내 말을 모든 이들이 귀하게 여겨주길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그리고 그런 성향이 아닌 내게 말로 끼를 부리길 바라는 것도 그저 욕심이었다. 나는 나대로의 방식을 지켜가면 되는 것이었다.
<나의 해방일지> 속 나의 네 번째 해방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처세술에 대한 고민으로부터의 해방.
난, 니가, 말로 사람을 홀리겠다는 의지가 안 보여서 좋아. 그래서, 니가 하는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