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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ul 22. 2024

사람을 고르고 선택하는 이 시대가, 난 더 버거워.

<나의 해방일지>에서 찾은 두 번째 해방



<나의 해방일지 > 1화 중,


두환 개똥이 개똥이 그러지 마라. 마흔이 넘었는데.

정훈 마흔이 뭐냐. 쉰 다 됐을 거다.

창희 이런 시골에선 친구도 식구랑 같은 거야. 식구를 가려 만나? 그냥 태어나니까 식구래. 그냥 태어나니까 친구래. 옆집에 애 하나 있대. 학교에선 바로 옆에 앉은 짝도 맘에 안 들면 딴 애랑 놀면 돼. 동네 친구, 이건 답 없어. 돌아버려.

정훈 야. 나도 돌아버려. 나도 너 맘에 들어서 친구 한 거 아냐.

기정 (뜬금없이) 난, 조선시대가 맞았어.

기정은 취기에 휑한 얼굴. 무리는 ‘뭐래?’하는 시선으로 보고.

기정 ‘오늘부터 저 사람이 니 짝이야’ 그럼, ‘넵, 오늘부터 열렬히 사랑하겠습니다’ 그러고 그냥 살아도… 잘 살았을 것 같애. …

              사람 고르고 선택하는 이 시대가, 난 더 버거워.

미정 …(무슨 말인지 알겠는)

두환 난 맨날 까여도 이 시대가 좋아.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난 백퍼 쌍놈이거든.

 사람을, 그리고 관계를 물건마냥 여기는 시대가 온 것 같다. 쉬이 판단하고, 재고, 따지고, 비교하고. 이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 이 사람이 내 옆에 있음으로 내 가치가 더해질 수 있는지. 친구도, 연인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도구가 되는 시대가 찾아온 것 같다. 이 사람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지보다 이 사람의 외모가 어떤지, 이 사람의 직업이 무엇인지, 연봉이 얼마인지, 재산이 얼마인지, 집안은 어떤지. 그 사람 자체보다는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외적인 것이 더 중요해 보인다. 그리고 서로 다름의 가치를 존중해 주며 맞춰나가기보다는 내 입맛에 맞지 않는다면 쉬이 관계를 놓아버린다.  

 사람을 고르고 선택하는 시대가 더 버겁다는, 차라리 인연을 정해주는 게 더 나을 거 같다는 기정의 대사에 눈길이 멈췄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왜였을까.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건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큰 축복이지 않을까. 왜, 사람을 고르고 선택하는 시대가 더 버겁다고 느껴지는 걸까.

 아주 어렸을 때부터의 인간관계를 차근차근 생각해 봤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의 시절, 혹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만 해도 그저 사는 곳과 나이대가 비슷하면 모두 친구가 되었다.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은 모두 같은 아파트 같은 동, 어머니들끼리 친한 아이들이었다. 내가 능동적으로 선택한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와 그렇게 잘 맞는 성향의 아이들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같은 동네에 사는, 같은 나이대의 친구여서 친하게 지냈던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싸우기도 많이 싸웠던 관계였다. 상대방이 나를 속상하게 만들면 덜컥 울어버리고, 서운하면 솔직하게 서운하다고 이야기하고, 화가 나면 버럭 화를 내고, 고마운 일에는 수줍은 미소를 띠며 마음을 전하기도 하며 다양한 감정을 공유했다. 아마 내 인생에서 타인에게 감정적으로 가장 솔직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감정에 더 솔직했던 것도 있지만, 관계에 대한 선택권이 없었기 때문도 있었다. 부모님끼리 친하고, 거주지가 가까우면 아무리 안 맞더라도 결국엔 같이 놀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친구에게 속상한 부분은 고쳐달라고 말하고, 내가 서운하게 했던 부분은 더 조심하며 더 좋은 관계를 쌓아가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다름에서 중간을 찾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중, 고등학교 때는 그 폭이 좀 더 넓어졌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생겼다. 30명에서 40명 남짓한 아이들 중, 나랑 더 잘 맞는 친구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저 같은 동네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친구가 되었던 초등학생 때와는 달리, 중고등학교 때는 내 단짝, 그리고 무리를 선택하게 된다. 학기 초에는 원래 알고 지내던 익숙한 아이들과 무리를 짓지만, 점차 나와 잘 맞는 아이들과 새로운 무리를 형성한다. 이때부터 관계에 대해 고민이 시작된다. 내가 단짝으로 삼고 싶은 친구는 다른 아이를 단짝으로 여기며 선택받지 못하는 경우. 지금 지내는 무리와 잘 맞지 않는다고 느끼면, 나와 더 잘 맞는 무리로 옮겨갈까 고민하는 경우. 혹은 같은 무리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가 거슬리는 경우. 관계에 대해 선택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나와 더 잘 맞는 상대를 찾기 위해 고민한다.

 대학생, 그리고 사회인. 중고등학교 때는 선택권이 넓어졌을지라도, 그 폭이 한정적이었다. 같은 학교, 혹은 같은 동아리나 학원. 학생 신분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범위는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관계 범위가 희미해졌다. 더 많은 집단에 노출되고, 어찌 되었든 단체생활이 불가피했던 중고등학교 때와 달리, 개인생활이 충분히 보장된다. 그에 비례해 사람을 네이버 가격비교 마냥 재고 따지는 일이 많아졌다. 내 입맛에 맞는 사람. 맞춰나가기보다는, 그저 내 입맛에 맞는 사람을 찾기 위해 사람을 고르고 고른다. 백화점 진열대에 진열되어 있는 옷을 고르는 마냥. 어렸을 때는 일단 옷을 사고, 그 옷을 내 몸에 맞게 수선해 나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진열되어 있는 옷을 몸에 대어보고 안 맞는 것 같으면 바로 내려놓는다. 그리고 또 다른 옷을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이런 재고 따지는 건 연인을 선택할 때, 그리고 배우자를 선택할 때 특히 심해진다. 친구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내 모든 일상을 공유하지 않아도 되고, 감정과 마음을 적당히 내가 원하는 만큼 나눌 수 있는 관계다. 이런 것들을 공유하는 것에 의무감이 크지 않은 관계다. 하지만, 연인이나 배우자는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다른 관계들보다 내 일상이나 감정을 더 많이 공유하게 된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여도 하루정도 아무 말 없이 아무 연락을 안 해도 서로 서운한 감정을 느끼지 않지만, 연인 관계는 반나절만 연락 두절이 되어도 서운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어쩌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가장 쉽고, 서로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기도 가장 쉬운 관계다. 그리고 연인이나 배우자는 꼭 있어야만 하는 ‘필수적’인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재고 따지는 경향이 더 심해지는 것 같다. 나와 잘 맞는 사람일까,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일까,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일까, 이 사람의 단점이 용인해 줄 만한 것인가.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그저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에 충실했다. 이 사람의 외모가 어떻든, 직업이 어떻든, 가진 것이 얼마나 있든. 그저 사람 하나만을 보고, 내 감정에 충실하며 사랑을 했다. 그리고 그 사랑 하나만을 보며 그 사람과의 미래를 꿈꿨다. 사랑에 겁이 없었던 시간들이었다. 아무리 이 사람의 결점이나 다른 점이 눈에 훤히 보이더라도, 그 점들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의 일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제일 중요하던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요즘엔 사랑이 쉽지 않은 것 같다. 마음을 키워가는 것도, 무럭무럭 자라난 마음을 주는 것도 쉽지 않다. 이 사람은 과연 나와 잘 맞는 사람일까. 의심하고 재고 따지게 된다. 서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도 서운한 감정이 들거나 좁혀지지 않는 차이점을 발견하면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혹 이 사람보다 나랑 더 잘 맞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닐까. 서로에게 맞지 않는 관계를 이어가며 서로의 시간을 낭비하는 건 아닐까.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이런 생각을 쉬이 지울 수 없다. 연인 관계는 그 끝이 헤어짐, 아니면 결혼이기 때문에 애매모호한 관계로 놔둘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끝없이 고민하게 되는 것 같다. 이 사람은 나와 잘 맞는 사람인가,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는가. 그리고 역으로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가. 연인과의 관계는 특히 매 순간이 선택이기 때문에 특히 더 어렵다. 이 사람을 계속 사랑하는가. 이 사람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어가며 연인으로, 친구로, 지인으로 나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은 스쳐 지나가며 흔적들을 남기고 갔다.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은 때로는 추억이기도, 상처이기도, 교훈이기도 했다. 흔적들이 하나둘씩 늘어갈수록, 사람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어떤 이가 내게 다가와도 일단 두 팔 벌려 반갑게 맞이하고 보던, 진심을 나누던 과거와는 달리, 누군가가 내게 찾아왔을 때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내게 상처를 주지 않을 사람인가, 재고 따지는 게 늘어만 갔다. 진심은 꼭꼭 감춰둔 채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검증이 먼저였다. 겁 없이 모험에 뛰어들었던 지난날들과는 달리, 나는 꽤나 까다로운 쇼퍼가 되었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은 잘라내고, 밀어내며 나와 잘 맞는 이들만 내 세계에 남겨두고, 안으로 들였다. 나와 비슷한 속도를 가진 사람들, 나와 비슷한 색을 가진 사람들, 나와 비슷한 세계를 가진 사람들. 내 세계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쉬이 진심을 주지 않았다. 여러 시간 지켜보고 판단하고, 이 사람은 들여도 괜찮겠다는 확신이 들 때쯤 아주 조금씩 진심을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확실히 예전보다는 인간관계 때문에 상처받는 일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상처받는 일이 줄어드는 만큼 알맹이 없이 껍데기뿐인 관계도 늘어났다.  

 사람은 선택권이 많을수록 필연적으로 후회도 커진다. 무언가를 선택하면, 의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이것보다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선택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따라온다. 허난설헌처럼 본인과 맞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 한평생을 고통받았던 이들을 생각하면 내 곁에 둘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지금은 어쩌면 축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선택권으로 인해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이 후회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과거에는 그저 죄 없는 내게 주어진 ‘운명’을 탓하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시대에는 사람으로 인해 고통스럽다면, 그 관계를 선택한 내가 원망스러워지고, 선택하지 못한 다른 선택지에 대한 미련이 가득 차기 마련이다.

 기정의 대사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던 건, 진심을 숨긴 채 사람을 간 보고 재고 따지는 것에 대한 염증 때문이었다. 관계에서 안 맞는 부분이 생기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생각하기보다는 이 사람이 맞나, 고민을 해오는 요즘 때문이었다. 상처받기 싫어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요즘 때문이었다. 차근차근 글을 쓰면서 확신이 들었다. 내가 해방되고 싶었던 건 관계에서 상처받을까, 후회할까 내 마음을 잔뜩 웅크리게 만들었던 ‘겁’이었다.




 지금 내가 선택한 사람들이 최선이 아니어도 좋다. 그 사람들이 내게 상처를 입혀도 좋다. 겁에 억눌려 진심이 제 빛을 꺼내보이기도 전에 바래져 버린다면, 그토록 후회가 남는 게 무엇이 있을까. 진심을 다 주고 상처받는 것보다, 두려워 진심을 다 주지 못하고 상대방이 떠나갔을 때가 더 괴로웠던 것 같다.

 물론, 사람 보는 눈을 가릴 필요는 없다. 내 사랑을 받을 가치조차 없는 이들에게 귀한 진심을 내어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상처받을까, 이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있을까 두려워하지 않고자 한다. 처음인 것처럼, 어린아이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 번째 해방, 사랑을 그리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자. 처음인 것처럼, 어린아이처럼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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