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속 찾아낸 첫 번째 해방
#48. 한강 변(저물녘 혹은 밤)
기정 아무한테나 전화 와서 아무 말이나 하고 싶어.
원희 (황당) 여태 떠들었는데. 맨날 떠들었는데. 여전히 떠들고 싶니?
기정 …(잠잠한 얼굴) 나, 하고 싶은 말은 못 했어. / 존재하는 척 떠들어대는 말 말고, 쉬는 말이하고 싶어. 대환데… 말인데… 쉬는 것 같은 말… / 섹스라고 말하지만, 나 사실, 남자랑, 말이 하고 싶어
하루를 살아가면서 꽤나 많은 말을 주고받는다. 맡은 프로젝트의 진행상황에 대해 팀장님께 보고드릴 때, 직장 내 전화기를 통해 쏟아지는 질문들에 대해 담당자로서 답변을 할 때와 같은 업무적 대화들. 점심시간에 팀원들이랑 커피숍에 둘러앉아 나누는 이야기들, 직장 메신저로 친한 동료들과 나누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친구들과 카카오톡 메시지로 주고받는 사소하기도, 유쾌하기도, 진지하기도 한 이야기들. 하루에도 수많은 단어와 문장들을 만들며 살아간다.
극내향형인 나는, 누군가와 언어를 공유하는 것조차 에너지가 소모된다. 내가 타인과 주고받는 대화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는 것마저도 내게는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그게 실제로 얼굴을 맞대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든, 얼굴을 보지 않고 글자로만 나는 이야기이든. 직장에서 가볍게 나누는 안부인사도, 점심시간 카페에 앉아 나누는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이든, 친한 사이의 지인들과 카톡으로 나누는 메시지이든, 하다못해 같이 엘리베이터를 탄 사람이 핸드폰 너머의 누군가와 나누는 이야기일지라도. 모두 크든 작든 내 에너지를 조금씩 갉아먹는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내 방에 들어와 핸드폰을 덮어둘 때야 비로소 세상의 ‘말’ 속에서 분리될 수 있다.
왜, 내게 말은 노동으로 느껴질까. 기정의 대사에 공감을 하며 곰곰이 곱씹어 봤다..
‘나 하고 싶은 말은 못 했어 존재하는 척 떠들어대는 말 말고, 쉬는 말이 하고 싶어. 대환데… 말인데… 쉬는 것 같은 말…’
말은 어찌 되었든 에너지를 깎아 먹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에너지를 소비하는 말이 쉼이 될 수 있던가. ‘에너지 소비’와 ‘쉼’은 마치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 같았다.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하는데 문득, 내 방 책상 앞 코르크 판에 붙어있는 절친한 친구와의 사진을 보며 깨달았다. 쉬는 말의 의미를.
업무적인 대화나, 매장에서 주문을 할 때와 같은 단순 의사표현의 대화를 제하고, 내가 내뱉는 말들은 두 종류였다. 그 자리에 존재하는 척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말, 그리고 꾸며내지 않아도 자연스레 나오는 말. 예컨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스몰토크’ 같은 것들이 존재하는 척 떠들어대는 말이었다. 오늘 날씨가 어땠고, 이번 주 어딜 놀러 갔고, 무슨 옷을 샀고, 요즘 연예인이 누구랑 사귄 대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위해서, 내밀한 나의 속마음이나 생각은 꽁꽁 감춰둔 채 ‘나는 지금 이 시간에 어울리려고 노력하고 있어’라는 걸 표현하기 위한 말들. 이런 말들은 에너지를 계속 갉아먹는다. 내가 하고픈 말도, 듣고 픈 말도, 관심 있는 주제도 아니니까. 그냥 주욱 늘어져있는 시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내가 지금 여기서 어울리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어요,라는 걸 표현하는 것.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 아닌, 억지로 만들어내는 말.
이 존재하는 척 만들어내는 말을 위해서는 꽤나 많은 품이 필요했다. 내가 이 말을 하면 상대방은 어떻게 생각할까. 예의 없진 않았을까, 이 상황에 나누기 적절한 말이었을까, 대화의 티키타카가 이어지기 적당한 말이었을까, 나와 이 사람의 관계에서 나눌 수 있는 깊이였을까. 사람들이 겪어보지 못한 상대방의 테두리를 만들어가는 건 오로지 그 사람의 말뿐이기에, 만들어내는 말을 내뱉는 건 언제나 조심스러워진다.
쉬는 말은, 상대방이 뭐라고 생각할지 걱정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 안에 곱게 포장해 놓은 좋은 일이든, 까슬까슬 걸리적거리는 고민이든. 시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닌, 내가 전하고 싶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 이것이 내게 쉬는 말이다. 덩어리 진 마음을 꺼내놓으면 말을 통해 내 안의 것이 뭉텅 뽑혀 나가지만, 상대방의 진심 어린 마음으로 다시 숭덩 차오른다. 나를 향한 진심 어린 눈빛, 표정, 말투, 그리고 상대방이 담겨있는 말 그 모든 것들이, 혹은 그 말을 듣고 있는 상대방 자체만으로 뭉텅 뽑혀버린 마음은 다시 차오른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지 않고 내 마음을 편히 보여줄 수 있는 말. 그게 쉬는 말 아닐까.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30분 간 머릿속에 있는 말을 모두 쏟아내는 모닝페이지를 한 지 거의 2년이 다 되어 간다. 오늘도 모닝 페이지를 쓰는데 문득, ‘이것도 쉬는 말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닝 페이지를 오래 쓰다 보니 어느 순간 나 자신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속상한 일을 터놓으면 위로의 대답이 들려오고, 고민을 털어놓으면 진심 어린 조언이 따라온다. 기쁜 일을 나누면, 순수한 축하가 들려오기도 한다. 대부분이 내가 먼저 말을 걸면 마음에서 대답이 따라오곤 하지만, 어느 순간엔 마음이 먼저 말을 한다. 어제 이런 일에 이런 감정이 들었다고. 마음이 보내오는 말을 가만히 들어주며 나 또한 다정스레 그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그랬구나, 그런 마음이었구나.
나와 하는 대화. 이 또한 쉬는 말이었다. 물론, 사랑하는 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듯 다정한 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태클을 거는 친구의 태도로 내가 하는 말을 받아치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문을 꽁꽁 닫고 그 어떤 말도 해주지 않으니까 말이다. 내 마음이 보내오는 말들에 고집스러운 가치 판단을 내려놓고 이해해 주고, 공감해주다 보면 마음은 수다쟁이가 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마음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면 어느샌가 조금 더 나와 친해진다. 친해질수록 마음은 점점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더 많은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 과정 속에서 나를 좀 더 알아가고, 거칠거칠했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부족한 듯 허했던 마음이 조금씩 차오른다.
관계에 따라, 위치에 따라, 상황에 따라 존재하는 척 내뱉는 말이 필요할 때가 많다. 어쩌면 우리는 존재하는 척 떠들어 대는 말을 잘하는 사람들을 보며 ‘사회성이 좋다’, ‘사회생활을 잘한다’라고 평가하는 것 같다. 존재하는 척 떠들어대는 말은 내밀한 관계까지 갈 필요하 없는 사이에서 윤활유 역할을 해주기에, 이것 또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기정의 대사를 통해 가끔은 내가 내뱉는 말의 종류를 돌이켜볼 필요도 있음을 배웠다. 쉬는 말이 우리 삶에 비중을 얼마나 차지하고 있는지. 대화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내뱉는 만들어내는 말이 아닌, 내 진심을 내어주고 상대방의 진심을 받아들이는 쉬는 말. 쉬는 말을 할 수 있어야 내게는 그 관계가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그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었다. 존재하는 척 떠들어대는 말만이 오고 가는 관계는 서로의 세상에서 이방인으로만 존재할 뿐, 그 세상에 정착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모든 관계를 쉬는 말을 할 수 있는 사이로 발전시킬 생각은 없다. 복잡한 사회 속 진심을 나눌 만한 사람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말이다. 또한 함부로 진심을 내어주기에는 꽤나 각박한 세상이니까. 하지만, 소중한 사람을 만날 때만큼이라도, 서로의 진심을 나누며 쉬는 말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나 자신과 쉬는 말을 더 자주 주고받아야겠다. 내가 뽑혀나가는 말만 하고, 에너지를 갉아먹는 말만 하다가는 우리의 속은 텅 비어버리고 말 테니 말이다.
말에 대해 생각해 보며 깨달았다. 내가 왜 그리도 밖에만 나가면 에너지가 쭉쭉 소모되는지. 왜 그리도 집에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지. 사람들과 나누는 시시콜콜한 카톡을 답장을 보내지 않은 채 오래 묵혀두는 지를. 내가 하고 싶어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 아닌, 무언가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부러 만들어내는 말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것이었다. 사람들이 내뱉는 말에는 그 사람의 삶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생각 없이 내뱉는 한 마디에도 실은 말하는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 경험 등 그 사람이 살아온 세상이 담겨있다. 말의 의미를 귀하게 여기려고 하며, 함부로 하는 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내 성향 덕에 그런 존재하는 척 떠들어대는 말이 조금은 버거웠던 것 같다.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며,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동안은 쉬는 말만은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부러 만들어내는 말에서 온전한 해방은 어려울지라도, 말의 비율은 조절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소중한 이들, 그리고 나 자신과 쉬는 말을 하는 시간들을 마련하며 빠져나간 에너지를 채우고, 내가 생각하는 ‘말’의 가치를 지켜가는 것. 나의 해방일지 속 발견한 첫 번째 해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