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속 찾은 다섯 번째 해방
나의 해방일지 대본집 1권,
Episode 2
보람 얼른 겨울 왔으면 좋겠다.
미정 겨울엔 또 그럴걸. ‘얼른 여름 왔으면 좋겠다.’
보람 (맞는 말)
미정 지금 기분 잘 기억해 뒀다가, 겨울에, 추울 때 써먹자. 잘… 충전해 뒀다가 겨울에…(충전하는 듯 싱긋)
보람 그럼 겨울 기억을 지금 써먹으면 되잖아요. 추울 때 충전해 둔 기분은 없어요?
미정 (피식)
이 부분을 보며 아, 하고 눈이 크게 떠졌다. 기억을 써먹을 수도 있겠구나. 흘러가는 시간, 사라져 가는 기억이 항상 아쉬웠다. 가슴 아프게 슬펐던 일이든, 눈물 나게 좋았던 일이든 결국은 시간 앞에 그 색을 바라는 게 항상 아쉽기만 했다. 그래서 내게 기억은, 움켜쥐어 붙잡아 두고 싶은 것이었다. 특히 소중한 기억이라면. 조금만 더 오래 내 곁에 머물러 주기를.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 좋아하는 순간들은 사진으로 남기는 버릇이 있다. 내 눈앞에 있는 이의 가장 젊은 오늘을, 어쩌면 다시는 똑같은 모양새를 볼 수 없을 오늘의 하늘을, 소중한 이와 나누는 사소한 메시지를, 지금 느끼는 이 행복한 감정을, 순간을, 경험을. 때로는 찰칵하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도 하고, 음량 버튼과 홀드버튼을 동시에 눌러 캡처를 하기도 하고, 타자로 치기도 하고, 손글씨로 종이에 꾹꾹 눌러 적기도 하고. 내가 사랑하는 이 것들이 조금만 더 오래 내 곁에 머물러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마음으로 꽤나 많은 기록들을 남기고 있었다. 굳이 예쁜 척, 멋있는 척하지 않아도 내게는 너무나도 귀하기만 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준비되지 않은 채 찍힌 우스꽝스러운 사진들. 상대방이 나누어주는 마음이 너무 따스해 캡처해 둔 카톡 대화들, 조금은 더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 생각이 떠오르면 시도 때도 없이 남기는 핸드폰 메모장 속 메모들, 내게 울림을 주는 책 속의 문장들 그리고 그 문장들을 통해 나오는 사색들을 기록하는 블로그, 지금은 여유가 없어 잠시 중단했지만, 삶 속 행복했던 순간들을 인화해서 모아둔 사진첩. 시간 속 유실되지 않기를 애타게 바랄 정도로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그 기억들을 작은 메모지에 적어 모아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순간들’ 유리병.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서 남기는 기록들 말고도 매일 숱한 기록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매일 아침 내 머릿속에 부유하고 있는 감정과 기억의 파편을 털어내는 모닝 페이지 기록장, 출근하자마자 켜서 퇴근까지 내 왼쪽 모니터 하나를 가득 채우며 업무 시간들 속 할 일, 인사이트들을 기록하는 노션, 밤에 차분히 책상에 앉아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돌아보며 그날을 맺어주고 풀어주는 블럭식스 플래너까지.
내게 이런 기록물들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주욱 늘어선 서재 속 책이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과 함께 차곡차곡 쌓여가는 책들. 언젠가 다시 펼쳐봤을 때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기를. 때로는 시간을 쓸어 담아 서재에 두기도 하고, 소중한 추억만을 선별해 서재에 담아두기도 한다. 이 기록물들의 용도는 ‘보관’이었다. 지나간 시간의 조각들이 내게 조금 더 오래 남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미정의 ‘지금 기분을 잘 기억해 뒀다가, 추울 때 써먹자’, 보람의 ‘추울 때 충전해 둔 기분은 없어요?’라는 대사를 보며 문득 할머니네 곳간이 떠올랐다. 한편에는 감, 메주, 말린 생선 등이 짚으로 엮은 동아줄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간장, 된장, 고추장 등 여러 가지 장이 담겨있는 커다란 장독대들이 있고. 조금 더 오래 먹기 위해 땅속에 묻히고, 소금에 절여진 채소들. 신문지에 싸인 양파, 널찍한 돗자루 위에 동글동글 펼쳐져 있는 감자가 있는 곳간.
할머니네 곳간 속 음식들은 뭐 하나 대충 놓인 게 없었다. 이건 이렇게 보관해야 하고, 저건 저렇게 보관해야 하고. 각 식재료마다 저마다 맞는 보관 방법이 따로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 보관 방법에 따라 그 식재료들을 정성스럽게 솎아내고, 손질하셨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그러나 제 자리에 저마다의 방법으로 보관된 음식들은 세 명의 사랑스러운 딸들, 두 명의 듬직한 아들들을 키워냈다. 정성스럽게 보관한 그 곳간 속 음식들 은 혹독한 보릿고개가 찾아와도, 가정에 위기가 찾아와도 맛있고 따뜻한 식사가 되었다. 그 따뜻한 밥상과 함께 엄마와 이모, 삼촌들은 건장하고 건실하게 각각의 어른이 되었다.
곳간 속 음식들로 허기진 배를 채운다. 그 음식을 통해 우리는 에너지를 얻고, 그 에너지로 또 하루를 살아간다. 일터로 나가 삶을 꾸려나가고, 나에게 들어와 내면을 꾸려나간다. 나를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 그래, 우리의 추억들은 어딘가에 꽂혀 있는 책이 아니었다. 나를 살아가게 만드는 곳간 속 음식이었다.
이 부분을 보며 아, 이건 나도 써먹어야겠다, 싶었다. 조금 웃기지만, 그토록 기록에 진심이면서도 나는 기록해 둔 것들을 잘 꺼내보지 않는다. 정말 아주 가끔, 대청소를 할 때 호기심에 펼쳐보는 일 말고는. 어제는 행복했는데, 오늘은 불행해도, 어제의 행복이 오늘의 불행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니까. 하나의 사진이, 하나의 글이 되어 끝나버린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모아뒀던 감정과 생각들을 꺼내 주린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지 못했다.
추우면 옷을 껴입고 난로나 차 같은 따뜻한 것들을 곁에 두면 몸의 체온이 올라간다. 더울 때도 선풍기나 에어컨, 아이스크림 같은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것들, 혹은 차가운 것들을 곁에 두면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 신체의 온도는 쉽게 바꿔줄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온도는 몸처럼 쉽게 바꿀 수가 없었다. 배가 고플 때 식사를 하면 허기가 달래지고, 배가 부를 땐 잠시 산책을 하면 어느새 소화가 된다. 몸에 힘이 없으면 달콤한 것들을 먹으면 일시적으로 힘이 나기도 하고. 몸은, 내 마음대로 조절하기가 쉽다. 하지만 마음이 허기질 땐, 혹은 마음이 너무 부풀어 터질 것 같을 땐, 마음에 힘이 없을 땐 그리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집에 있는 냉장고는 때가 되면 채우면서, 왜 마음의 곳간을 채울 생각은 못했을까. 감동, 기쁨, 설렘, 뿌듯함, 애정, 슬픔, 연민, 괴로움, 부끄러움 등. 내가 느꼈던 감정들과 그 감정들을 만들어냈던 상황들을 차곡차곡 저장해 둬야겠다. 마음의 허할 땐 설렜던 감정을 꺼내 들어 그 감정들이 나고 자랐던 기억들을 톺아보며 마음을 채우고, 마음이 불평으로 가득 찼을 땐, 이 길을 위해, 사소하게 보이는 이 일상을 위해 얼마나 많은 오늘을 포기하며 괴로워했는지를 기억하며 감사하야겠다.
내 하루를 채우고 있는 감정과 기억들을 그저 흘러가게만 두고 싶지 않다. 책장 깊숙이 꽂힌 사진첩 속 빛바랜 사진으로만 남겨두고 싶지 않다. 이것들을 제 쓰임에 맞게 정성스럽게 손질해서 잘 보관한다면, 나를 배불리며 나를 살아가게 만드는 자양분이 될 테니까. 물론, 그때는 행복했는데 지금은 이렇구나, 하며 한탄을 하는, 현재를 더 불행하게 해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그 기억과 감정들이 독이 아닌, 자양분이 되게 하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의 몫이다.
지금 카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마무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모아두고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던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순간들’ 유리병을 열어봐야겠다. 그 순간들로 인해 유독 공허한 요즘의 마음이 조금은 차오르길 바라며.
<나의 해방일지> 속 찾은 다섯 번째 해방은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지나간 추억에 대한 허무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