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덩굴 위의 연극, 회색 컨테이너 아래의 하루
이 글은 1부 눈보라 속, 15km를 걸어온 고양이의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병원에서 사라졌던 삼색이가 어떻게 다시 길을 찾아 예전 영역 가까이로 돌아왔는지, 그 긴 여정을 먼저 읽어보시면 더 깊이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애월로 향하는 길, 이번 여정의 목적은 삼색이를 다시 만나러 가는 일이었다.
삼색이는 소품점 마당에서 태어나 두 번의 출산을 하고, 손님들이 내미는 손길과 햇살 드는 마당에서 자라난 고양이였다. 그러나 소품점이 문을 닫자 모녀는 무너진 건물 곁에 남게 되었다. 우리는 구내염 치료라도 해주고 싶어 병원에 맡겼으나, 허술한 창문 틈으로 두 아이가 동시에 사라졌다. 눈보라 치던 한겨울, 낯선 벌판에 홀로 내던져진 삼색이는 기적처럼 다시 길을 찾아 예전 영역 가까이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몸을 기댄 곳은 더 이상 햇살 가득한 마당이 아니었다. 폐기물 집하장 앞, 빛 한 줄 스며들지 않는 회색 컨테이너 밑이 그의 쉼터였다. 실종된 병원에서 무려 15km를 걸어 돌아온 끝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도 선뜻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한때 햇살과 사람의 눈빛 속에서 지내던 아이가, 이제는 폐기물 더미와 차가운 바닥에 몸을 기댄다니 가슴이 무너졌다. 언제나 먼저 다가와 몸을 부비던 아이가, 이제는 낯선 눈빛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회복되지 않은 구내염 탓에 밥을 먹는 일조차 힘겨운 모습이었다. 그 모든 소식은 마치 작은 가시가 되어 마음에 깊숙이 박혔다.
혹여 다시 마주하는 일이, 그 아이에게 또 다른 상처로 남을까 두려웠다.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발걸음을 붙잡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더는 주저할 수 없었다. 나는 결국, 무사히 버텨주어 고맙다는 인사와 오래 쌓인 미안함을 전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주차를 하고 소품점이 있던 자리에 서니, 건물은 이미 새로 지어진 숙소로 변해 있었다. 소품점이 사라진 뒤에도 인근 캣맘은 건물 뒤편에 작은 급식소를 두었다. 남은 고양이들이 발길을 멈출 자리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삼색이는 그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800미터나 떨어진 공터로 자취를 옮겼다. 햇살 아래에서 안온히 자라온 아이에게 낯선 골목은 오래 머물기엔 너무 험한 자리였을 것이다.
삼색이를 찾으러 가던 길, 크림빛 앞머리를 가진 고양이가 눈앞을 스치더니 곧장 차도로 뛰어들었다. 가슴이 철렁해 서둘러 뒤를 따랐다. 담 위에 올라선 고양이는 “따라오려면 까까라도 내놓으라옹” 하는 듯 눈을 맞추더니, 어느새 건물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 길을 따라 들어가자 뜻밖에도 삼색 고양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심장이 요동치며, 오래 기다려온 이름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삼색아―”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자 입가가 말끔했고 이마의 무늬도 달랐다. 내 안에서 안도와 허탈이 교차했다. 삼색이의 얼굴을 닮은 고양이를 앞에 두고, 잠시 숨을 고른 뒤 가방을 열었다.
작은 그릇에 사료와 간식을 내어주자, 이내 사방에서 고양이들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앞서 사라졌던 크림빛 앞머리의 흰 고양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그 뒤를 따라 치즈 고양이 둘과 고등어 무늬 고양이도 합류했다. 요술 방망이라도 흔든 듯, 건물 곳곳에서 뿅뿅 튀어나왔다. 다섯 마리의 눈빛이 재촉하듯 내 앞에 모였고, 나는 잠시 삼색이를 잊은 채 그 아이들과 식탁을 나누었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고양이들의 집중한 표정이 낯선 길 위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그러다 몇 발짝 물러서 인사를 건네려는 순간, 눈앞에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건물 전체를 휘감은 초록 덩굴, 그 안에 뚫린 네모난 창처럼 열린 공간 속에서 고양이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지붕 위로 뛰어올라 가지를 타는 고양이, 계단 아래로 내려섰다가 다시 튀어 오르는 고양이, 덩굴 사이에서 고개를 불쑥 내미는 고양이…. 저마다의 동선을 주고받는 모습은 한 편의 연극 같았다. 무대 위에서 제 몫의 장면을 살아내는 배우들처럼, 고양이들은 그 초록 무대의 주인이었다. 멀찍이서 바라보니 비로소 선명해졌다. 오래된 동화 속 요정의 집 같기도 하고, 앨리스가 작은 문을 열고 맞닥뜨린 다른 세계 같기도 했다. 빛과 바람, 덩굴과 고양이들이 어우러져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다. 카메라에 담아도 다 옮길 수 없는, 살아 있는 그림 같은 장면.
10여 년 전, 이곳은 단순히 음악과 술을 즐기는 공간이었다. 지금은 초록 덩굴이 건물을 감싸고, 고양이들이 오르내리는 무대가 되었다. 그 모든 아름다움은 낮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저녁에 불이 켜지는 시간, 이 무대는 다시 고양이들의 자취가 감춰진 또 다른 세상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우연히 마주한 작은 세계는 한동안 나를 붙들어 세웠다. 현실의 풍경이면서도, 잠시 마음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따뜻한 발견이었다.
그 아름다움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건물 뒤편에 사료와 물그릇이 놓여 있었다. 무심히 내려놓은 듯 보였지만, 그 그릇들이 고양이들의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길 위에서는 차를 피해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던 아이들이, 이곳에서는 온전히 자기 모습으로 노닐고 있었다. 뜻밖의 풍경은 무거웠던 내 마음을 잠시 덜어주었지만, 공터에서는 삼색이를 끝내 볼 수 없었다. 대신 밥자리에 나타난 검정고양이를 바라보며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돌아오는 길, 허전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한 달 뒤 다시 애월을 찾았다. 이번에는 꼭 만나야겠다는 마음으로 아예 숙소까지 잡았다. 하루 종일 공터를 오가며 이름을 불렀으나 삼색이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날은 요정건물의 고양이들만 만날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다시 찾아갔을 때였다. “삼색아―” 부르는 소리에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왔다. “야옹―” 하고 내는 울음과 함께 아이가 달려 나왔다. 처음엔 경계심을 놓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눈을 깜박이며 조금씩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무사히 돌아온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여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주식캔과 키튼 사료를 내어주었고, 츄르를 조심스레 입가에 가져가니 예전처럼 받아주었다. 그 순간의 감각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다.
삼색이가 머무는 공터에는 또 다른 고양이들이 드나들었다. 검정고양이는 거리를 지키며 그릇에 놓인 밥만 받아먹었고, 흰빛이 섞인 치즈 고양이는 달려와 박치기를 하고 발라당 누우며 애정을 표현했다. 손길에 길든 아이인지 빗질을 해주면 고요히 몸을 맡겼다. 삼색이를 보러 갈 때면 이 두 고양이도 함께 달려 나와 맞아주었고, 나는 그들이 허락한 거리만큼 다가가며 시간을 나누었다. 빗으로 털을 정리해 주는 짧은 순간조차 작은 의식처럼 소중했다.
불과 300미터 남짓한 거리를 두고 마주 선 두 풍경은 극명히 달랐다. 요정건물의 아이들이 보여주는 자유로운 장면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면, 삼색이의 풍경은 그 아름다움과 겹쳐질 때 더욱 가슴을 저리게 했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바람을 맞으며 살아가지만, 한쪽은 덩굴과 햇살 속에서 계절의 무대를 누리고, 한쪽은 차가운 바닥 위에서 하루를 견뎌야 했다. 그 대비 속에서 나는 오래도록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이 무렵부터 내 발걸음은 제주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겨졌다. 삼색이를 만나러 가는 길목에서 언제나 요정건물의 고양이들과 다정한 시간을 보냈고, 인근의 다른 급식소와 돌봄 장소들까지 찾아가게 되었다.
애월은 이제 내게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삼색이를 만나러 가는 길목에서 언제나 요정건물의 고양이들도 함께 마주하기 때문이다. 초록 덩굴에 둘러싸인 건물은 계절마다 다른 장면을 보여주었다. 여름의 짙은 초록, 가을의 붉은 물결, 겨울의 앙상한 가지와 그 위를 오르내리는 고양이들. 그 풍경은 늘 새로운 연극 무대 같았다. 덩굴은 계절의 변화를 기록했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고양이들의 모습은 한 폭의 계절화가 되었다.
소품점이 사라진 뒤부터 이어진 인근 캣맘의 돌봄은 이곳까지 닿아 있었다. 그는 매일같이 공터를 찾아와 사료와 물을 챙기며 아이들의 삶을 지켜주었다. 회색 컨테이너 앞, 삭막한 공터에서 삼색이와 친구들은 그 손길을 기다리며 하루를 이어갔다. 차갑고 황량한 풍경이지만, 그 작은 정성 덕분에 아이들의 삶은 여전히 따뜻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삼색이는 가끔 찾아와 주는 육지 언니에게도 더 반갑게 달려와 몸을 부비며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빗질을 해주는 손길도 받아줄 만큼 가까워졌고, 예전의 따스한 삼색이로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함께한 시간이 끝나면, 삼색이는 늘 다시 컨테이너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안도와 아픔이 동시에 밀려왔다. 무사히 곁에 있다는 기쁨 속에서도, 여전히 그 아이의 집은 바람이 스며드는 차가운 바닥이었기 때문이다.
삼색이와 요정건물의 고양이들, 전혀 다른 두 풍경은 어느새 하나의 이야기처럼 겹쳐졌다. 아름다움과 안쓰러움이 교차하는 그곳에서, 나는 늘 같은 질문과 같은 희망을 안는다. 안쓰럽고도 고마운, 애월의 고양이 삼색이를 보러 가는 길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