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청춘은 잿빛이다

지워져 온 청춘의 초상-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by 사하

종갓집 장손을 아빠로 둔 탓에 나는 명절 때마다 가족임은 분명하지만 정확히 무슨 사이인지는 알 수 없는 수많은 친척들과 악수회를 가져야 했다. 스물두 살의 추석 연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어정쩡한 미소로 인사를 주고받던 중 어떤 어르신이 대뜸 내게 물으셨다.


그래, 즐겁제?


질문이라기보단 확인사살에 가까운 어투에 당황한 내가 엉겁결에 그렇다고 대답하자, 어르신은 ‘원래 그맘때가 제일 즐겁다~’라며 유유히 지나가셨다. 제일 즐겁다던 그맘때, 내 일기장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고 그다지 살고 싶지도 않지만 살아있으니 일단은 살자는 식의 체념 비슷한 다짐들이 매일매일 적혀있었다. 어벙벙하게 서서 어르신의 말씀을 곱씹어보던 나는 혼자 생각했다. 즐겁긴요, 하루하루 엿같은데요.


청춘靑春. 만물이 푸른 봄철이라는 뜻으로 십 대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시절을 의미하는 단어다. 청춘이라고 하면 어떤 고정된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이를테면 푸른 하늘, 만개한 꽃, 불꽃놀이, 비눗방울, 땀 흘리며 열심히 달리는 소년들의 뒷모습 같은 것. ‘청춘’을 내건 영화나 드라마에는 저런 식의 청량하고 상큼하면서도 어딘가 처연한 장면들에 더해 꿈, 사랑, 우정과 같은 메시지가 빠지지 않는다. 그 결말이 해피엔딩인지 배드엔딩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청춘’이라는 말로 대충 얼버무리면 된다. 사랑하든 이별하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죽든 살든, 청춘은 ‘뭘 해도 아름다운’ 법이니까.


과거란 본디 미화되기 마련이므로 청춘을 아름답게만 보는 마음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모든 청춘이 푸르르고 풋풋하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뭐랄까, 치사하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함부로 내뱉기엔 어떤 청춘은 필요 이상으로 아프기에, 어떤 청춘은 푸를 수 없는 잿빛이기에, 청춘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여기,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잿빛 청춘을 담아낸 영화가 있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청춘답지 않은 청춘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첫 장면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2001)는 제법 귀엽고 풋풋한 청춘의 풍경으로 시작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다섯 명의 주인공들은 교복을 입고 바닷가 앞에서 자기들끼리 시시콜콜한 장난을 친다. 별 것도 아닌 일에 꺄르르 웃고 사진을 찍는 소녀들의 모습은 가히 청춘스럽지만, ‘청춘 같은 청춘’은 거기서 끝이다. 오프닝 시퀀스가 지나가고 해맑은 웃음소리가 멈춘 후에 비로소 영화는 시작되고, 조금은 다른 청춘들의 이야기가 그려지기 시작한다.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청춘들은 상당히 구체적인 ‘위치’를 가진다. 다섯 명의 주인공 혜주, 태희, 지영, 비류, 온조는 ‘IMF 이후, 인천의 여상을 나온 스무 살 여성’이라는 공통된 좌표 위에 서 있다. 하지만 같은 색의 교복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다섯 명의 삶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빽’으로 서울의 증권사에 취직한 혜주는 멋진 커리어우먼을 꿈꾸며 열심히 일하고, 태희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우나에서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일을 돕는다. 다니던 공장이 인수된 뒤 밀린 월급도 받지 못한 지영은 천장이 내려앉는 집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고 있고 쌍둥이인 비류와 온조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액세서리를 팔면서 서로에게 의지해 살아간다.


청춘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캠퍼스의 낭만, 풋풋한 사랑, 간절한 꿈같은 건 안타깝지만 이 영화에서는 찾을 수 없다. 어떻게든 생활이라도 영위하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는 지영은 신원보증을 서줄 부모님이 없으면 일할 수 없다는 소리를 듣고, 집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떠나고 싶다는 태희의 희망은 순진한 헛소리 취급을 받는다. 유일하게 직장에 취직한 혜주는 영어 공부를 하고 라식 수술을 하는 등 자신을 가꿔보지만, 상사에게 ‘언제까지 저부가가치로 살 거냐’라는 말을 들을 뿐이다. 모험을 떠나거나 절절한 로맨스를 시전하기엔 실패할 자원이, 사랑할 시간이, 꿈을 꿀 돈이 없다. 추근덕대는 상사, 가족들의 무시, 가난과 불안, 그리고 외로움이 있을 뿐인 이 청춘들은 무너지기 직전의 위태로운 잿빛이다.


청춘은 혼자 앓는 감기다

혜주(이요원, 왼쪽)와 지영(옥고운, 오른쪽)

사랑도 꿈도 없으니 우정은 있지 않을까, 싶지만 그마저도 쉽게 허락되진 않는다. 영화의 주요 갈등은 혜주와 지영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고등학교 시절 가장 친했던 두 사람은 졸업 후 상황이 변하면서 미묘하게 어긋나기 시작한다. 혜주는 먼저 직장인이 되었다는 자부심과 ‘여상 출신’이라는 불안한 입지로 인한 열등감이 뒤엉켜 지영의 자존심을 긁는 말들을 하고 지영은 그런 혜주에게 상처 받고 아이들을 점차 멀리 한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신경 쓰는 사람은 태희가 유일한데,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은 꼭 만나야 한다며 모임을 주도하던 태희는 혜주에게 사과하라며 부추기기도 하고 연락이 끊어진 지영의 집에 찾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지붕이 내려앉은 집에서 지영의 할머니가 건네는 만두를 물도 없이 먹으며 태희는 알게 된다.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는 고양이를 맡기듯 누군가에게 내 삶을 부탁할 수 없고, 그저 각자에게 주어진 삶과 불행을 홀로 우적우적 씹어낼 뿐이라는 것을. 어떤 불행은 턱이 아프게 씹어대도 조금도 작아지지 않아 억지로 욱여넣은 만두처럼 얹혀있겠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을. 목이 막혀 죽지 말라고 기도나 할 뿐 우리는 입안에 들어찬 자기 몫의 삶을 감당하기도 바쁘다는 것을. 그러니까 우리는 혼자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찬란하기 그지없다는 스무 살 청춘에, 태희는 고작 그런 것을 배운다.


지영의 집에서 만두를 먹고 있는 태희(배두나)

영화가 전개될수록 지영에게 주어진 불행의 몫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위태롭던 판잣집은 결국 무너져 내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돌아가신다. 무너진 잔해에서 ‘죽고 싶다 죽이고 싶다’라고 빼곡히 쓴 종이가 발견되면서 지영은 살해 혐의로 구치소에 들어간다. 태희는 함께 지영의 면회를 가자고 친구들을 설득하지만 혜주는 바쁘다는 말뿐이고 비류와 온조도 지영의 일에 무심하다. 혼자서 지영을 찾아간 태희는 말한다. 네가 도끼로 사람을 찧여 죽였다고 해도 네 편이라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무슨 일이냐고 다그치지도, 섣불리 판단하지도 않는 태희의 말에 지영은 다물고 있던 입을 열고 담담한 목소리로 답한다. “나가도 갈 데도 없는데 뭐.” 수많은 불행들에 단념해버린 듯한 지영의 한 마디에 태희는 대답을 구할 수 없다.


제발 그만하라고 애원하고 싶을 만큼 무심하게 잔인해지는 스토리이지만, 결말에 이르러 영화는 나름의 ‘해피엔딩’을 그려낸다. 태희는 지영이 자신에게 맡겼던 고양이 티티를 비류와 온조에게 부탁하고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한 만큼의 돈을 훔쳐 출소한 지영에게로 간다. 어디로 갈지는 모르지만 그건 가면서 생각해보자고, 그렇게 함께하게 된 태희와 지영을 태운 듯한 비행기가 날아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눈물겹게 ‘청춘’ 같은 결말이지만, 영화가 끝나고나면 어쩐지 개운함보다는 씁쓸함이 남는다.


그토록 아름답던 청춘의 이미지를 이질적으로 만들어버린 <고양이를 부탁해>가 여전히 ‘수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영화에서 목격한 청춘의 낯선 얼굴을 이미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구든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라지만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고, 보잘것없는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 누군가를 상처 주던 시절. 갑작스럽게 낮아진 삶의 온도에 몸을 떨어보아도 누구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고 지켜주지 않던 시절. 한없이 잔인하고 쓸쓸하던 시절. 단지 잊어버렸을 뿐 누구나 그러한 청춘을 겪기 마련이니까. 조금은 한심하고 못됐고 철없고 미련한 영화 속 청춘의 얼굴을 매일 거울 속에서 마주하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을 테니까.



너의 청춘을 부탁해


코로나 19가 휩쓴 2020년 상반기 20대 여성 자살률은 지난해 대비 43% 증가했다. 무려 296명의 여성들이 어떤 말할 수 없는 이유들로 삶을 놓아버렸다. 이백 구십 육이라는 숫자를 막막히 헤아리고 있으면 혜주와 태희, 지영의 얼굴이 떠오른다. 개봉한 지 20년이 지난 케케묵은 영화를 지금 꺼내보는 이유는 바로 그 얼굴들 때문이다. 함부로 아름답다고 찬란하다고 말해버릴 수 없는 잿빛 청춘의 초상. 어쩌면 나를, 내 주변의 친구들을, 이백 구십 육이라는 아득한 숫자를 닮아있을 그 얼굴들이 자꾸 아른거려서, 헤아릴 수 없는 그 삶들에 조금이라도 가닿고 싶어서 괜히 오래된 영화를 더듬어본다. 그래 봤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내 몫의 삶을 열심히 씹어 삼키는 일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를 검색하면 2012년에 이런 평점이 작성되어 있다.

“스무 살이 되어서 이 영화를 보면 10점을 줄 것 같아서 미리 준다. 언니들, 잘 살고 있죠?”

잘 살고 있죠? 나에게도 언젠가 그 물음에 답할 날이 올 거라 믿으며, 어딘가에서 삶을 견뎌내고 있을 청춘들에게 얘기하고 싶다. 그 누구도 아닌 너의 삶을 잘 부탁해. 각자의 몫을 잘 살아내줘. 그리고 우리 나중에 꼭 같이 대답하자. 잘 살고 있다고. 잘 지나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