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힘들어

의외로 평범한 인생의 미학-영화 <거북이도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by 사하


어렸을 때부터 좀 어지간한 사람이었다. 착하고 순하다는 말을 듣고 자라온 아이답게 무엇을 주장하거나 요구할 줄을 몰랐다. 참는 게 미덕으로 여겨지던 어린 시절에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탄 듯 굴어도 얌전하고 참하다는 칭찬을 들었지만, 개성과 주관이 중시되는 요즘에 오니 이 타고난 무던함만큼 난감한 게 없다. 특출나게 잘하는 거야 당연히 없고, 우유부단한 탓에 뭘 시도하거나 포기할 용기도 없다. 무언가 하나에 미칠 줄 알아야 성공한다던데 어떻게 된 건지 내 마음은 뜨뜻미지근한 정도에서 더 데워지지가 않는다. 쉬지 않고 열정적으로 인생을 가꿔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불안해진다. 의문이 퐁퐁 솟아난다. 나, 이대로 괜찮은 걸까?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남들은 어떻게 사나 싶어 드라마나 영화를 틀어보아도 나 같은 종류의 인간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평범하게 설정된 캐릭터라도 이야기를 이끌기 위해서는 특별함이 부여되기 마련이니까. 그게 외모든 성격이든 능력이든 어떤 상황이든 간에 주인공은 그 특별함을 가지고서 자신의 욕망을 따르다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한다. '나라는 사람... 어떤 뛰어난 감독이라도 손 쓸 수 없을 거야'하는 생각에 울적해지는 순간 한 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얘는 잘하는 것도 없고 커서 뭐가 되련지"에서 '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2006)이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너무 평범해서 비범한 주부

스즈메(우에노 주리) 계단을 오르다가 사과 더미가 쏟아져서 넘어진다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의 주인공 '스즈메'는 '어중간함'으로 설명되는 캐릭터다. 거북이에게 밥을 주는 것이 하루의 중요한 일과인 스즈메는 정류장에 서 있어도 버스가 그대로 지나칠 만큼 흐릿한 존재감의 소유자이다. 센스도 취향도 모두 어중간한 스즈메의 삶은 평범하다 못해 '평균 이하'로 여겨진다. 엄청난 행운도 거대한 불행도 없는 스즈메의 일상은 좋게 말하면 평화롭고 나쁘게 말하면 지루하다.


하지만 아무리 단조로운 영화라고 해도 사건은 있어야 하는 법. 스즈메는 어느 날 계단에서 넘어졌다가 손톱만한 크기의 '스파이 모집 포스터'를 발견하게 된다. 반신반의하며 포스터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건 스즈메는 얼렁뚱땅 면접을 거쳐 스파이가 되어버린다. 스즈메와 마찬가지로 평범해 보이는 스파이 부부는 스즈메의 평범함을 칭송하며 그에게 미션을 주는데, 바로 '최대한 평범하게 살기'다. 스파이는 눈에 띄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평범해야 한다는 요지다. 요상하기 짝이 없는 미션을 받은 후부터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던 스즈메의 싱거운 하루하루는 미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평범하게 살려면 힘들겠군

'평범하게 장보기' 미션을 수행 중인 스즈메


평범하게 살자고 의식한 순간, 스즈메는 평범함의 어려움을 깨닫게 된다. 이불을 터는 일도, 장을 보는 일도, 거북이에게 밥을 주는 일도 '평범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쉽지가 않다. 평범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상품 추첨에서 일회용 휴지가 나와도 기쁘기만 하다. 스즈메는 하찮게만 보였던 자신의 어중간한 운, 취향, 센스가 이렇게까지 감사할 때가 없다. 평범하게 살기를 수행하면서 그렇게 스즈메의 일상은 조금씩 특별해진다.


달라 보이는 것은 스즈메의 삶뿐만이 아니다. 스파이가 된 후 스즈메는 평범해만 보였던 동네 사람들의 심상치 않은 사정들을 알게 된다. 어중간한 맛의 라멘집 사장님도 한가해 보였던 공원 벤치의 할머니도 두부 가게 사장님도 모두 평범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스파이였다는 파격적인 사실과 함께, 스즈메는 늘 자기보다 나은 삶을 산다고 생각했던 친구 쿠사쿠의 뒷 사정도 알게 되고 짝사랑하던 선배의 치부도 알게 된다. 평범하거나 화려해 보였던 삶의 뒷면들을 발견한 스즈메는 더 이상 자신의 어중간함을 신경 쓰지 않는다. 느린 줄만 알았던 거북이가 빨리 헤엄친다는 사실처럼 모든 삶에는 저마다 의외인 구석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어중간한 자신의 삶에도 빛나는 순간들이 존재함을 인지한 순간부터 스즈메는 원하는 만큼 자유로워진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스파이들은 자신들을 쫓는 공안부를 피해 도망치고 스즈메는 자신이 알게 된 평범하고도 특별한 삶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스파이들이 사라지고 스즈메의 일상은 다시 전처럼 돌아오지만, 그 일상을 살아가는 스즈메까지 전과 같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삶의 내용이 같더라도 사는 방식이 달라진다면 그때부터 인생은 특별해지고, 스즈메는 이미 그 특별함을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흔하더라도 뻔하지 않게

스즈메와 스즈메의 아빠


모든 삶은 저마다의 특별함이 있다는 영화의 메시지는 일종의 정신승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우리는 각각의 삶들을 '성공'의 척도로 나누고 비교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알 수 없는 기준 안에서 어떤 삶은 화려해 보이기도 하고 어떤 삶은 별 볼 일 없어 보이기도 한다. 내 삶이 '별 볼 일 없음'에 가깝게 느껴질 때는 조급해지고 우울해지기도 한다. 비교와 평가가 문화가 된 세상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는 일 자체를 비난할 수야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삶도 함부로 판단받을 이유는 없다는 거다. 판단하기 시작할 때 삶은 뻔해지고 삶이 뻔해질수록 사는 건 치졸해진다. 사랑할 것은 줄어들고 재미는 없어지며, 세상은 마치 성적표처럼 지루해지고 모질어진다.


그렇기에 엉뚱발랄한 이 영화에서 내가 보는 것은 '자세'다. 사람과 삶을 바라보는 자세. 조금이라도 더 높아지려고 까치발을 들고 끙끙거리는 게 아닌, 몸을 낮게 기울이고 눈에 닿는 것들을 천천히 오래 바라보는 태도. 작은 것에서도 놀라운 발견을 해내는 시선과 진중하고 유쾌하게 삶을 즐기고 존중하는 마음. 그렇게 흔하더라도 뻔하지 않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가 말하는 평범하고도 비범한 삶의 미학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