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다움'을 향한 미완의 발버둥-영화 <미성년>
몇 달 전 집 청소를 하다가 나의 유치원 시절 기록을 발견했다. 기록의 필자는 엄마 그리고 유치원 선생님이었다. 6살인 내가 먹기 싫은 반찬을 몰래 떨어뜨리곤 눈치를 본 이야기, 개미를 밟아 죽이는 남자애들을 일러바친 이야기, 이것저것을 집요하게 물어봐서 귀찮게 했다는 이야기들이 두 사람의 수기로 꼼꼼히도 적혀 있었다.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이야기였다. 어릴 때 나 제법 귀여운 걸? 하면서 읽던 중 하나의 기록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유치원 운동회날 달리기 경주를 하던 내가 흙바닥에 누군가 그려놓은 그림을 밟지 않으려고 피하다 넘어졌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읽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쓸쓸했다. 이야기 속 6살짜리 아이인 내가,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순수하던 어린 시절은 기억 너머의 영역으로 사라졌고 나는 이제 '아이'가 아니다. 뭘 안다고 말할 순 없지만 모른다고도 말할 수 없는 그런 나이, '집에 어른 있어요?'라는 질문에 우물쭈물하다가 없는데요,라고 대답하고 마는 그런 나이. 침대에 드러누워 배만 긁적이고 있으면 '이게 어른의 꼴이라면 참 열없다'라는 생각이 든다. 6살의 나는 적어도 달리기 1등보다 누군가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줄 알았는데, 지금의 나는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는 사람 같다. 6살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어른'이 무엇인지 잘 알 것만 같다. 스무 살이 지나면 성인成人이 된다고 하는데 그게 어른이 된다는 의미일까? '어른다움.' 그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 <미성년>을 다시 봤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미성년>은 제목 그대로 '미성년'들이 주인공이다. 학교를 마치면 학원에 가거나 알바를 가는 지극히 평범한 열일곱 청소년, 주리와 윤아가 부딪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두 사람이 조우한 곳은 윤아의 엄마 '미희'가 하는 오리가게. 그곳의 손님이자 미희의 애인, 그리고 미희의 뱃속에 있는 아이의 아빠인 '대원'은 주리의 아빠이기도 하다. 즉, 주리와 윤아가 대면한 곳은 바로 각자의 아빠와 엄마가 불륜을 저지르는 현장. 다짜고짜 불륜이라는 '성인물'로 인생 장르가 뒤바뀐 두 미성년은 부모님의 '일탈'을 수습하려 애쓴다.
불륜을 다룬 여느 영화들과는 판이하게, <미성년>에는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며 소리를 지르는 치정극이나 피 묻은 복수극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 장면을 펼치기엔 불륜의 당사자들이 너무 하찮고 철이 없다. 대원을 '마지막 사랑'이라고 부르는 미희는 아이를 지우라는 윤아의 말에 왜 나를 이해해주지 않냐며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대원은 아내 '영주'에게까지 불륜 사실이 들키자 놀랄 만큼 찌질하게 도망친다. 영주가 미희를 찾아가고, 미희가 조산을 하는 점입가경의 상황에서도 정신을 차리는 건 주리와 윤아다. 윤아는 알바비를 빼면서까지 영주가 대신 지불한 미희의 병원비를 갚고, 주리는 도망간 아빠에게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애쓴다. 아무렇게나 불행을 벌여놓은 '성년'들은 꽁무니만 빼는데, 그 불행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서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건 '미성년'들이다.
사랑에 빠진 순수한 미희의 얼굴보다 불행에 능숙한 윤아의 얼굴이 조금 더 '어른'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윤아에게 '어른의 권리'가 주어지진 않는다. 윤아는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할 수밖에 없지만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신분을 숨겨야 하고, 어찌저찌 태어나버린 남동생 '못난이'를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지만 '어른의 동의' 없이는 출생신고도 할 수 없다. 영주의 병원비를 갚기 위해 도박 중독자인 아빠를 찾아갔을 때, 윤아는 헛소리만 늘어놓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열일곱이야. 아직 카드도 못 만들고 현금 서비스도 다 못 받아." 홀로 책임져야 할 상황의 연속들과 '학생은 공부나 해라'라는 전언에 동시에 떠밀리는 윤아는 성년도, 미성년도 될 수 없다.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선 윤아의 여리고 날 선 눈빛은 '어른'은 무엇인지를 묻는 듯하다.
시종일관 당차고 야무지게 행동하던 윤아는 이상하게도 동생 못난이에 대해서는 미련하게 군다. '엄마의 배를 주먹으로 때리고 싶었다'던 윤아와 '태어나지 말라고 저주'했던 주리는 아이러니 하게도 영화에서 못난이와 교감하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조산아로 태어난 못난이가 눈 한 번 떠보지 못하고 죽었을 때도 그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윤아와 주리다. 동생을 키우기 위해 고등학교를 자퇴할 거라고 말하고, 못난이의 죽음을 부정하는 윤아의 모습은 이제껏 유지해온 냉철함이 무색할 정도로 '철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의문이 든다. 윤아와 주리를 '철없다'라고 말할 자격이 누구에게 있을까, 누군가의 '잘못'에서 비롯됐을지언정 태어난 생명을 진심으로 애정해주고 '아무도 찾지 않는 죽음'을 애써 찾아와 애도해주는 그 마음이야말로 '어른다움'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 말이다.
그렇다고 <미성년>이 '어른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정답을 말하는 영화는 아닌 듯하다. 영화 속 성년과 미성년인 영주와 미희, 주리와 윤아 모두 아이와 어른의 경계를 오가고 있으니 말이다. 영화는 성년과 미성년의 위치를 완전히 뒤바꿔 어른의 표본을 보여주기보다는 미숙과 성숙이 뒤섞인 복잡한 네 인물들이 서로 만나는 순간에 집중해 '어른다움'에 대한 질문을 넌지시 던진다.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린 영주에게 휴지를 건네는 윤아, 동생의 죽음을 회피하던 윤아에게 애도를 끝까지 마무리하자고 손을 내미는 주리, 아이를 잃은 미희에게 죽을 사다 주는 영주, 대원과의 관계를 끊고 윤아 앞에서 눈물을 터뜨리는 미희. 미움과 분노, 원망과 애증으로 시작된 네 사람의 만남은 용기 내 마주 본 얼굴과 기어이 건네는 손길 속에서 조금씩 생장하는 마음들을 품는다.
그 찰나의 마음들에서 내가 발견한 '어른다움'이란 이런 것이다. 거지 같은 순간들의 연속에서도 나의 자존과 상대의 자존을 지키고자 하는 것. 중요한 순간과 아닌 순간을 구분할 줄 알고 그것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 싸우고 화내고 속을 삭이고 실수하고 잠 못 들면서도 다시 숨을 고르는 것. 미숙하고 서툰 몸짓을 반복할지언정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 보는 것. 삶을 통과해보는 것. 미완의 상태에서 한 발 더 나아가려는 몸부림, 발버둥질, 나아가기 위해 한 번 더 웅크리는 자세. '어른다움'이란 특정 나이를 지나면 저절로 얻어지는 자격증도, 타고난 능력이나 구체적인 행위도 아닌 바로 그런 '몸짓'이 아닐까.
그 몸짓이 스무 살의 기점에서 울리는 제야의 종소리로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미성년>을 보고 나면 이름 앞에 '미未'를 붙여야 할 존재들이 성인으로 불리지만 책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인지, '급식충', '잼민이'라고 불리지만 저마다의 고민을 성실히 끌어안고 있는 아이들인지 알 수 없게 되니 말이다. 그렇기에 '어른다움'은 끝없이 질문되고 여러 사람들의 삶으로 살아져야 하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비로소 '어른'의 의미가 유효한 빛을 발하는 사회가 되는지도.
*
거울 속 내 얼굴이 이제 제법 어른 같다. 누군가 그려놓은 그림을 밟지 않기 위해 애쓰던 어린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내가 어떤 몸짓으로 살아가느냐에 달려있을 테다. 자조하고 비관하게 되더라도 몸을 웅크리고 계속 나아가보기로 한다. 어른이, 기왕이면 어른다운 어른이 되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