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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하 Sep 18. 2021

먹고 사는 당신에게

천양희 시 <밥>

안녕하세요, 사하입니다. 다섯 번째 편지네요.

잘 지내시나요. ‘잘’의 방식으로는 아무래도 포식(飽食)과 숙면이 기본 옵션일 텐데요. 먹고 자는 일은 인간의 생존 문제인데도 ‘잘’ 먹고 ‘잘’ 자는 일은 어째 난이도가 극상인지 모르겠어요. 어떤 하루를 보내고 계시든, 양질의 밥과 잠이 항상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평소보다 못한 밥을 먹고 지내는 중입니다. 오해는 마세요. 양이 줄었을 뿐이거든요. 평소 저의 식사는 뭐랄까, ‘될 대로 돼라’는 식이였는데요. 언제 무엇을 얼마나 먹든 혀만 즐거우면 됐다는 입장을 고수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몸이 생존과 멀어지고 있더군요. 단명은 조금 곤란한지라 극단의 조치로 일체의 간식과 과식을 금하게 되었다는 애달픈 사연입니다.

애달파진 김에 제 ‘식사의 역사’를 참회하는 시간도 가져보았는데요. 이상하게도 ‘혀의 기쁨’을 추구한 것치곤 즐거운 식사를 언제 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옛날 만화를 보면 한껏 포식한 주인공이 만족스러운 한숨을 쉬면서 ‘잘- 먹었다’라고 말하곤 하잖아요. 즐거운 식사라면 으레 그런 훈훈하고 넉넉한 모양일 텐데, 제 기억 속 식사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오히려 먹고 나면 어딘가 공허해지는 식사였죠.

설명을 덧대기 위해 약간의 TMI를 발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될 대로 돼라’의 식사 방식을 개시한 건 타지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한 스무 살부터인데요. 친구를 사귀어도 낯가림이 심해서 밥은 혼자 먹을 때가 많았어요. 낯선 공간과 여유로운 사람들 속에서 홀로 음식을 씹다 보면 이유 없이 주눅이 들곤 했죠. 문득문득 ‘내가 왜 여기에 있지’라는 생각이 아득히 치밀어 오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기의 식사들은 정말이지, 제 뼈와 살의 균등한 성장을 위해 애쓰신 초중고 모든 영양 선생님들이 한탄할 정도였습니다. 일주일을 내리 컵라면으로 때우는 건 대수였고 돈이 부족하면 배를 불리려고 부러 탄산음료를 마시기도 했어요. 유난스러웠던 하루에는 아주 맵거나 아주 달달한, 그야말로 ‘혀’만을 위한 식사를 해치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먹어도 속은 늘 허했어요. ‘내일은 더 맛있는 걸 먹자’라고 다짐해도, 첫 입의 즐거움이 지나면 아무것도 없었죠. 배는 더부룩한데도 끝없이 무언가가 먹고 싶었습니다.

하이에나도 아닌데 먹이를 찾아 헤매느라 돈은 돈대로 줄고 살은 살대로 불던 첫 학년 첫 학기. 당시 교양으로 듣던 시 수업 하나가 있었는데요. 강의 시작마다 시 한 편을 소개하시던 교수님은 어느 날 <밥>이라는 제목의 시를 들려주셨습니다. 전문이 이래요.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천양희, <밥>


이 시를 곱씹으면서 저는 어렴풋이 알게 되었어요. 제가 씹고 있던 것이 밥이 아닌 삶이라는 걸요. 급변해버린 삶의 경로에 어정쩡히 서있던 스무 살의 저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몰라 그저 닥치는 대로 살고 있었다는 걸요. 그렇게 거칠게 목을 넘어간 터라 속을 채우지 못하고 허공에 흩어졌던 거겠죠. 밥도, 삶도요.

하지만 삶은 어차피 소화해야 할 것. 뱉지 말고 씹어내라는 시인의 말은 휑한 속을 아주 조금이나마 달래주었어요. 시가 삶의 맥락과 일치하던 순간, 시가 삶의 맥락을 만들어내던 그 순간에 저는 그 어떤 위대한 시를 읽을 때보다도 시와 가까워졌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죠.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는 삶을 좀 더 꼭꼭 잘 씹어서 소화시키기 위함일지도 모른다고요.

삶을 두고 ‘먹고사는 일’이라고 하잖아요. 먹는 일과 사는 일은 그렇게 닮았나 봅니다. 그런 고로, 이제부터는 밥을 좀 더 꼭꼭 씹어보려고요. 급하게 넘기다 체하면 안 되니까요. 속이 상해서 아프면 안 되니까요. 그렇게 살듯이 먹고 먹듯이 살아서 잘 소화해보려 합니다.

당신의 포식을 바라는 인사에도 조금은 구체적인 옵션이 추가될 듯해요. 그냥 잘 먹지 말고, 소화도 잘 시켰으면 좋겠습니다. 되도록 체하지도 말고 아프지도 말고요, 어디 한 번 잘 먹고 잘 살아보자구요.     


21.09.18. 사하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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