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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하 Nov 28. 2021

기억하는 당신에게

황정은 소설,『디디의 우산』

안녕하세요, 사하입니다. 열한 번째 편지예요.

11월의 끝자락입니다. 한 달이 지나면 한 해의 끝자락이 되겠군요. 일 년을 수고로이 통과하는 동안 제게 남은 잔여물은 무엇인지 벌써부터 돌아보게 돼요. 당신에게는 무엇이 남아있나요? 그것이 혹 찌꺼기 같은 기억들이라면, 올해가 떠나갈 때 함께 씻겨갔으면 합니다.

새해가 될 때마다 괴로운 기억들도 ‘리셋’된다면 좋겠지만요. 해가 수백 번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 사라질 수 없는 기억도 존재합니다. 이 편지를 쓰는 제 책상에는 노란색 탁상 달력이 놓여있는데요. 올 초 4.16 재단에서 받은 후원 선물이에요. 책자 형태의 달력 왼편에는 그 달 태어난 세월호 희생자 분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아래에는 그들의 이름이 소복이 쌓여있습니다. 각 이름들 앞에는 수식어가 붙어 있어요. ‘똥 싸는 것도 예뻐서 별명을 똥깔놈이라 붙여준 김범수’, ‘엄마와 걸음걸이까지 닮은 단원고 장동건 조봉석’ 같은 식으로요. 귀엽지 않나요. 애정이 푹푹 담겨서 괜히 웃게 되는 이름들이에요.

세상의 온갖 좋은 말을 가져오고픈 마음을 한 문장에 넣느라 끙끙 애썼을 이름들을 더듬어 읽다 보면, 그 속에 너무도 구체적인 기억이 스며있어 멈칫할 때가 있습니다. 가령 이런 이름들이요.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엄마인 줄 알고 현관문을 먼저 열어주는 아들 이승민’

‘엄마가 힘들다고 하면 김치볶음밥을 만들어주는 집안의 분위기 메이커 김혜선’

‘엄마가 쪽지를 남기거나 편지를 쓰면 꼭 답장을 해주는 아들 박홍래’


‘열어줬던’, ‘만들어줬던’, ‘해줬던’ 같은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이름을 감싸고 있는 기억들이 너무 소소하고 너무 따뜻해서, 너무 살아있어서 말이죠. 몇 되지 않는 문장을 읽는 동안 호흡이 자꾸 끊깁니다.

황정은의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에는 어느 날 갑자기 사물에게서 사람과 같은 온기를 느끼게 된 주인공 ‘d’가 나옵니다. 차갑게 식어있어야 할 사물들이 마치 생물처럼 미지근한 온기를 띠게 된 거죠. d가 그 온기를 역겨워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연인 ‘dd’가 버스 사고로 죽은 후입니다. dd의 물건들이 이제는 없는 dd의 온기를 흉내 내어 d를 기만해서, dd는 그렇게 없는데도 있고 있는데도 기어코 없어서, d는 그 ‘없음’에 참을 수 없는 환멸을 느낍니다.

     

“누군가가 없어져도 그를 기억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여기 없어도 여기 있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그러냐? 사기를 치지 마라…… 인간은 너무도 사물과 같이…… 없으면 없어. 있지 않으면 없고 없으니 여기 없다” 『디디의 우산』, 22쪽.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살아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상실을 위로하고 이해하기 위해 저 역시 그렇게 말하던 때가 있었지만요.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어본, 우리 모두는 사실 알고 있잖아요. 기억은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는 걸. 기억으로 살아나는 건 기억뿐이라는 걸. 그렇게 지독하게 무참한 것이 상실이라서 우리는 절대 누구도 함부로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자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이 펄펄 살아있도록. 펄펄 살아서 더는 죽지 못하도록. 기억도, 사람도.

지난 23일, 5·18 광주 민주항쟁의 학살을 주도한 전두환이 죽었습니다. 어제 열린 영결식에서 부인 이 씨가 읽은 추도사 중 사과의 내용은 단 15초. 그마저도 5·18 관련 사과는 아니라고 후에 언급되었죠.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사망한 자는 최소 193명. 후유증 사망자는 376명. 행방불명자는 65명. 41년간의 침묵과 15초의 ‘대리 사과.’


“무섭지도 않은가? 사람들은 기억한다.

사람들은 온갖 것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기억은 망각과 연결되어 있지만 누군가가 잊은 기억은 차마 그것을 잊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화석이다. 뼈들은 역사라는 지층에 사로잡혀 드러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퇴적되는 것들의 무게에 눌려 삭아버릴 테지만 기억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기억은 그 자리에 돌아온다.

기록으로, 질문으로.”  황정은 에세이 『일기』, 76쪽.


앞서 말한 소설의 한 장면에서 d는 청계천 건너편에서 세월호 인양을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d는 생각하죠.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나.”* d의 질문에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어요. 망각과 침묵에, 환멸과 무력에, 우리를 함부로 잃어버리는 무참한 세계에.

죄를 모르고 죽은 죄인의 뼛가루는 잊힐 기회 없이 몇 번이고 꺼내져 이 땅에 돌아오겠죠. 기록에 의해, 질문에 의해. 그렇게 살아있는 기억들은 잠재적 화석이 되어 언제고 길을 잃은 우리에게 돌아올 겁니다. 샛노란 달력에 빼곡히 적힌 이름들처럼요.

당신의 달력엔 어떤 기억들이 살아있나요. 올해가 지나가고 새로운 해가 찾아와도 그 기억이 맹렬히 살아있기를 바래봅니다.


2021.11.28. 사하 보냄.               




*“다른 장소, 다른 삶, 다른 죽음을 겪은 사람들. 그들은 애인(愛人)을 잃었고 나도 애인을 잃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d는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나. 하찮음에. 하찮음에.” 『디디의 우산』, 144쪽.


*아래는 참고한 기사입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21031.html

http://www.4th.kr/news/articleView.html?idxno=2009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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