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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재 Oct 25. 2024

묵형墨刑

-simjae



  묵형墨刑


  유현숙  


             

  나뭇잎을 덮고 잠들었습니다 잠 속으로도 비는 들이칩니다      


  볕 좋은 오후에는 집을 나서지만 

  골목은 끝이 짧고

  나는 그만 되돌아옵니다

  사람들 속에서도 춥습니다


  단단한 자단은 도끼날에 자색 물이 묻어 납니다 

  땅이 뜨거운 여름과 지리한 장맛비의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지요

  지열과 습풍이 나무뿌리에 그립게 스민 까닭이지요     


  살을 타고 먹물을 길어 올려 쓴 이야기들 말고는 무엇으로도 형상하지 못한 

  젊은 날의 문자들이 내 안에 있습니다

  내가 자단 같이 단단해지는 날들이라 부를까요

  몇 차례 천둥이 울고 바람이 붑니다 높은 산의 그늘에서는 꽃들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마당은 텅 비었고 그늘에 누운 꽃은 통째로 말라가고 

  당신을 보낸 뒤 나는 내실의 커튼을 걷지 못합니다

  커튼은 무겁습니다

  내 살을 열고 묻은 별 한자리, 그것은

  당신이 남긴 말씀이라 여겨도 되는지요

  나는 쓸쓸해져서 오래도록 들여다봅니다

  사기잔에 스민 차 맛처럼, 나를 아프게 한 쓸쓸함처럼


  지나간 날이 깊어지면 늘 이렇습니다 오늘은 곤한 내 잠 속으로도  

  비가 들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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