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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재혁 Jun 28. 2020

숙성

오래된 것이 맛도 좋다

세상 참 좋아졌다. 집에서 에어컨 켜고 누워 뭐든지 유튜브로 뚝딱, 이제는 니체까지 엿볼 수 있다. 우연히 고병권 작가님? 철학자님? 의 강연을 유튜브로 접하게 되었다. 니체의 사랑관이라던지 루 살로메에 관한 일화라던지 썰 풀듯이 편하게 설명해 주시는 게 좋았다. 사실 가장 좋았던 건 니체를 정말 많이 읽은 사람이 해주는 이야기였다. 검색하며 마구 튀어나오는 그런 정보 말고 정말 맛이 진한 얘기가 필요했다. 니체 책 한 권쯤은 읽어보고 쏟아내는 이야기보다 안에서 시큼하게 숙성된 이야기가 필요했다.


무게와 깊이를 혼동하지 말어라.

무거워지지 말고 깊어져라.

그러나 그 깊이조차 허상일지 모른다.


강연 핵심 키워드 중 하나가 '숙성'이었다. 그리고 숙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시간'이다. 철학 공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고 한다. 칸트는 철학이란 성숙하는 것, 즉 미성년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했는데 무르익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높은 곳으로 혹은 저 깊은 곳으로 빠져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멀리 갈수록 그만큼의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은 당연지사다. 가는 길에 여기저기 둘러보기도 하고 이쁜 풍경 앞에 멈춰 있기도 하면서 시간을 좀 들여보자는 말이 아닐까.


사실 처음 니체를 접하게 됐을 때 마음속에는 항상 무언가 깨부수고 성취하고 더 진취적으로 되어야 할 것 같은 기분으로 가득 찼던 것 같다. 생각이 항상 생각으로만 머무를 때가 많아 일단 뭐라도 하고 보자는 마인드였고 경험하면서 배우는 것의 가치를 믿었다. 물론 그런 경험들은 너무 귀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값지다. 그런데도 내가 갈팡질팡 하는 이유는 저 깊은 곳에서 나에 대한 질문을 끌어올리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몇 년 동안 고민해도 해결이 안 된 문제를 너무 조급하게 끌어올리려 했던 것 같다.  


지우랑 뭔가 할까 말까 망설일 때 나는 무조건 해보라고만 먼저 얘기했었다. 하면서 배우는 거라고. 그렇지만 나 스스로도 뭔가 빨리 보여줘서 성과를 내야 할 것만 같고 최대한 많은 시도와 경험해보아야 할 것 같아 조급한 기분에 자주 휩싸였다. 그리고 그 조급함은 남들이 하는 만큼 나도 빨리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나를 더 몰아붙였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 중 내가 그 어떤 것도 당장 시작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깊이가 얕았던 것은 아닐까.


천천히  처절하게 하나씩 하나씩 내가 목표한 것들을 이뤄나가는  앞으로의 목표다. 이제는 충분히 숙성되기 전에는 내놓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기울여지고 나도 급하게 가지 말고 시간을 들여보자고 다짐해 보는 중이다. 사실  늦어지면  어때? 아직 스물일곱인데 벌써  이루면 나중에 심심해서 어떻게 살래.  스스로만 조급하지 않으면 괜찮을  같다. 니체도 젊은이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지 않으니. 대신 정말 진하게. 뭐가 되었든 간에 시간과 공을 들인 것에는 표가 난다. 단순 취향이라 할지라도 숙성된 취향에는 좋은 향이 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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