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사정표를 보며 대학 4년이라는 게 정말 무섭구나 생각했다. 머리는 이렇게 비었는데 정말 내가 이리도 많은 과목을 들었던 것이 맞나 싶다. 지금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수식이 난무하는 필기노트들을 보며 가관이라 생각했다. 대학을 와서도 시험기간에만 휘리릭 휘몰아치는 건 여전했구나. 성적표에 찍힌 꼬부랑 알파벳 숫자들은 정말 무의미한 검정 기호에 불과한 것 아닐까.
그렇다고 대학이 단순히 성적표, 졸업장만을 출력해 주는 기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보통은 4년 이상 몸담게 되는 대학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의 교류와, 취업을 위해서든 좋아서든 뭐든 온갖 활동들을 하면서 느끼고 성장하고 하는 모든 이 일련의 과정이 대학이라는 단어 안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부분에서는 개개인의 자율성이 주어지기 때문에 성적표에 찍히지 않는 성적이 남게 된다. 그 '진짜 성적'을 어떻게 보여 주느냐가 취업을 하기 위한 또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독일 등의 일부 선진국에서는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마치고 1년 정도의 자유 기간이 있다고 한다. 무엇을 할지 선택을 하기 전에 미래, 진로 대해 고민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나도 잠깐 숨 돌릴 시간이 있었다면 조금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자주 생각했다. 수능을 마치고 떠밀려온 자유에 어쩔 줄을 몰라 그냥 흘려보냈던 시간들이 길었다. 그때는 그게 낭만이라고 자위했던 날들의 연속이었던 1학년, 정신 차리고 공부해보고자 했던 2-3 학년, 온종일 딴 길로 샐 궁리만 하는 철없는 4학년. 이제까지 공부한 시간들이 아까워서 혹은 관성에 떠밀려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아 쓰는 자기소개서들이 미웠고 이제와 서야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조금 알게 된 것 같기도 하다. 너무 늦었고 아직 괜찮다.
평행우주론이 사실이라면 다른 세상의 나는 만족하며 잘 살고 있을까.
사실 전공 공부를 마음먹고 하면 성적도 나쁘지 않게 나왔다. 그러면 그 순간은 그냥 뿌듯하기도 하고 역시 사람은 잘하는 걸 해야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도무지 내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이 길을 빠져나가라고 무의식이 계속해서 나를 몰아 대는 것 같았다. 내가 잘한다고 해서 정말 이 분야에서 일을 하면 행복할까, 단순히 성적만으로 진로를 결정해도 좋은 걸까. 내 안에는 또 다른 모습의 나도 있지 않을까. 끝없이 의심하고 내심 다른 내가 있기를 기대했었다. 그렇지만 단지 기대감 만으로 뭘 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다. 이제까지 내가 쌓아온 것을 보여줘야 나를 뽑아갈 테니까.
보통 3년이라고 한다. 정말 무언가에 빠져 노력하면 결과가 나오는 시간 말이다. 3월부터 개발 공부를 시작했다. 아직 정말 바닥이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한 번 해보려고 한다. 이 또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지만.
이말년이 그랬다. 인생 열심히 살지 말고 대충 살라고. 대충 하다가 하나 정해서 미치라고.
포인트는 대충 하라는 말이 아니라 미치라는 것이다. 내 할 일에서 미쳐보기. 당분간 가슴에 새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