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이 맛도 좋다
세상 참 좋아졌다. 집에서 에어컨 켜고 누워 뭐든지 유튜브로 뚝딱, 이제는 니체까지 엿볼 수 있다. 우연히 고병권 작가님? 철학자님? 의 강연을 유튜브로 접하게 되었다. 니체의 사랑관이라던지 루 살로메에 관한 일화라던지 썰 풀듯이 편하게 설명해 주시는 게 좋았다. 사실 가장 좋았던 건 니체를 정말 많이 읽은 사람이 해주는 이야기였다. 검색하며 마구 튀어나오는 그런 정보 말고 정말 맛이 진한 얘기가 필요했다. 니체 책 한 권쯤은 읽어보고 쏟아내는 이야기보다 안에서 시큼하게 숙성된 이야기가 필요했다.
무게와 깊이를 혼동하지 말어라.
무거워지지 말고 깊어져라.
그러나 그 깊이조차 허상일지 모른다.
강연 핵심 키워드 중 하나가 '숙성'이었다. 그리고 숙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시간'이다. 철학 공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고 한다. 칸트는 철학이란 성숙하는 것, 즉 미성년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했는데 무르익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높은 곳으로 혹은 저 깊은 곳으로 빠져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멀리 갈수록 그만큼의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은 당연지사다. 가는 길에 여기저기 둘러보기도 하고 이쁜 풍경 앞에 멈춰 있기도 하면서 시간을 좀 들여보자는 말이 아닐까.
사실 처음 니체를 접하게 됐을 때 마음속에는 항상 무언가 깨부수고 성취하고 더 진취적으로 되어야 할 것 같은 기분으로 가득 찼던 것 같다. 생각이 항상 생각으로만 머무를 때가 많아 일단 뭐라도 하고 보자는 마인드였고 경험하면서 배우는 것의 가치를 믿었다. 물론 그런 경험들은 너무 귀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값지다. 그런데도 내가 갈팡질팡 하는 이유는 저 깊은 곳에서 나에 대한 질문을 끌어올리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몇 년 동안 고민해도 해결이 안 된 문제를 너무 조급하게 끌어올리려 했던 것 같다.
지우랑 뭔가 할까 말까 망설일 때 나는 무조건 해보라고만 먼저 얘기했었다. 하면서 배우는 거라고. 그렇지만 나 스스로도 뭔가 빨리 보여줘서 성과를 내야 할 것만 같고 최대한 많은 시도와 경험해보아야 할 것 같아 조급한 기분에 자주 휩싸였다. 그리고 그 조급함은 남들이 하는 만큼 나도 빨리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나를 더 몰아붙였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 중 내가 그 어떤 것도 당장 시작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깊이가 얕았던 것은 아닐까.
천천히 또 처절하게 하나씩 하나씩 내가 목표한 것들을 이뤄나가는 게 앞으로의 목표다. 이제는 충분히 숙성되기 전에는 내놓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지고 나도 급하게 가지 말고 시간을 들여보자고 다짐해 보는 중이다. 사실 좀 늦어지면 뭐 어때? 아직 스물일곱인데 벌써 다 이루면 나중에 심심해서 어떻게 살래. 나 스스로만 조급하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다. 니체도 젊은이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지 않으니. 대신 정말 진하게. 뭐가 되었든 간에 시간과 공을 들인 것에는 표가 난다. 단순 취향이라 할지라도 숙성된 취향에는 좋은 향이 나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