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CCTV 확보를 위해 본격적으로 나섰다. 먼저 옆집 빌라에 CCTV가 있는데 각도를 보면 스토킹 정황이 잡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라 건물주가 나오자 대뜸 인사드리며 "제가 스토킹을 당했는데요, 혹시 CCTV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라고 여쭤보았다. 이 분은 동네 마당발이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분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 자연스럽게 동네에 소문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핵인싸 건물주 아주머니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고, 나는 스토킹 피해와 경찰의 대응을 간략히 설명드렸다.
각도 상 CCTV는 빌라의 주차장과 분리수거함만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우리 집 입구와 건너편 길목까지 잡을 수 없을 것으로 서로 판단했고, 나는 아쉬워하며 돌아섰다. 나는 피해장소를 유심히 살폈고, 우리집 앞, 스토킹 당한 바로 그 지점에 있는 전봇대에 CCTV가 두 개 달려 있었는데 방범용 CCTV라고 적혀있긴 하나 이게 잘 작동되는지도 모르겠고, 그걸 확인하려면 어디에 연락해야할지 몰라서, 아이 하원 시간이 다 되어 일단 아이를 맞이하고, 경찰에 전화해서 이 CCTV 확인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어볼 참이었다. 그사이 딸아이가 유치원에서 하원을 했고 항상 그렇듯 밖에서 아이와 잠깐 같이 놀고 있었는데, 어느새 집 앞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있었다. 잔뜩 화가 난 옆집 남성분이 다가오시더니 나에게 대화를 요청했다.
옆집 어른: "잠깐 얘기할 수 있어요?"
나: "아, 네, 무슨 일로..."
옆집 어른: "내가 들었는데 스토킹 당해서 경찰이 왔었다면서요, 근데 인상착의만 묻고 그냥 갔다고요? 스토킹 당한 딱 그 지점에 있는 전봇대에 떡하니 가평군청 CCTV가 있는데 그거 확인도 안 해보고요? 하, 내가 어이가 없어서 진짜... 일단 내가 지금 경찰 불렀으니까 잠깐 같이 가시죠."
얼떨결에 따라나섰고 경찰들이 도착하자 옆집 남성분이 동네가 떠나가라 화를 내며 경찰의 안일한 대응에 대해 항의를 했다. 이분이 경찰에 항의 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첫째, 스토킹 신고가 들어왔는데 피의자 인상착의만 묻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점.
둘째, 조금만 관심을 가졌다면 정확히 피해 장소에 있는 전봇대에 가평군청 소속 CCTV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텐데 사건 피해 장소를 잘 살피지 않은 점.
셋째, 경찰이 이 작은 동네, 여기 방범용 CCTV 가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는 점. 몰랐다 해도 피해 장소 근처 CCTV 가 있는지 찾아보려고 노력도 해보지 않았고, 피해장소를 자세히 확인해 보려는 의지 조차 없었다는 점.
넷째, 피해자가 신고를 하면 근처 CCTV가 있는지 찾아보고, CCTV로 확인해서 피의자를 찾아서 조치를 취할 생각을 해야지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점.
다섯째, 피해자가 정식 신고를 했는데 진술서도 받지 않고 정식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는 점.
이 모든 것이 경찰의 업무태만이며, 이를 가평군청에 신고하겠으니, 그때 당시 담당 경찰관의 이름을 정확히 알려달라고 말했다. 지금 온 경찰들은 내가 처음 만난 경찰관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분은 실제로 가평군청에 컴플레인을 넣고 경찰의 업무태만을 신고 했다. 그 후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경찰이 CCTV 확보를 하지 않고, 피해자가 돌아다니면서 CCTV를 확인하러 다니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면서 여전히 큰 소리로 나 대신 화를 내주고 계셨다. 딱히 할 말이 없었던 경찰은 "피해자랑 어떤 관계에요?"라고 물었고 "옆집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그걸 물고 늘어졌다. "옆집 분이시면 좀 진정하시고, 이 사건은 피해자랑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경찰이 말하자 옆집 남자분은 더 화가 났다. 경찰의 뉘앙스가 '당신 일도 아니면서 참견하지 말아라, 피해자도 가만히 있는데 왜 당신이 난리냐.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좀 조용히 하고 빠져라'라는 식의 말투와 뉘앙스였다.
옆집 남자분은 "지금 말하는 것도 말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경찰이 잘못을 했으면 인정하고 죄송하다고 하고, 지금부터라도 잘 수사하겠다고 말하면 되지 참견하지 말라고 말을 하는게 맞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나도 딸이 있는데 밤에 아르바이트하고 혼자 돌아오는데 길에서 몇 번 스토킹 같은걸 당한 적이 있어서 딸 가진 아빠로서 걱정이 되니까 내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겁니다. 경찰에 신고를 했는데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됩니까? 만약에 당신 딸이고, 당신 가족이면 이렇게 수사를 했겠어요? 그 처음 온 경찰이 자기 가족이면 이렇게 했겠냐고요? 사건을 경찰이 조사하고 피의자를 경찰이 찾아야지, 이걸 피해자가 하고 있는 게 말이 됩니까?"라고 강하게 말씀하셨다.
점점 감정적 싸움으로 번질 것 같아 급히 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경찰관님, 저도 이 분 말씀에 동의해요. 왜냐하면 저는 매일 불안에 떨면서 무서워서 집 밖에도 못 나가고 있었는데, 스토킹 피해자에 대해서 국가가 아무런 수사 조치나 보호 조치도 없이 오로지 개인한테만 감당하라고 남겨두는 게 솔직히 많이 원망스럽고 서운했어요. 처음 오셨던 경찰 분이 피의자 인상착의만 묻고, CCTV 확보에 전혀 관심도 없고, 아무것도 안 한건 사실이잖아요?"
사람들은 점점 모여들었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배에 힘을 뽝 주고 차분하고 큰소리로 또박또박 이 말을 했고, 갑자기 모두가 조용해졌다. 그제야 경찰은 차에서 주섬주섬 진술서를 가져오더니 볼펜을 주면서 경찰차 트렁크 위에서 생각나는 걸 최대한 자세히 써보라고 했다. 경찰이 빨리 쓰라는 식으로 계속 재촉해서 집중하기 어려웠지만 최대한 시간과 팩트위주로 기억나는 핵심적인 부분을 썼다. 경찰은 CCTV 확인해 보고 피의자를 수색해 본 후 다시 연락을 주겠다는 말과 함께 그날 일은 일단락이 되었다.
마당발 아주머니들과 나를 대신해서 항의해 주신 옆집 어른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피해자에게 이러한 권리가 있는지 몰랐고, 경찰이 하라는 대로만 해야 하는 줄 알았고, 신고를 받은 경찰에게 이러한 의무와 대응 절차가 있는지 몰랐다. 나는 법률적인 내용을 몰랐기 때문에 피해자의 권리가 무엇인지, 피의자의 처벌법은 어떤 것이 있는지, 경찰의 의무와 행정조치는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피해자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내가 먼저 법률과 행정 지식을 잘 알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도 이웃 분들은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끝까지 관심을 가져주시며 나를 응원해 주시고 함께해 주셔서 정말 고마운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에도 좋은 어른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나도 그런 이웃이 되어주고 싶었다. 나보다 더 화를 내주시고, 직접적으로 항의를 내주시고 적극적으로 대응을 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서 몸둘바를 모를 것 같았다. 과거에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지냈던 지난날의 나를 반성하며, 이제는 서로 웃으면서 안부를 묻는 아주 든든한 이웃 공동체를 만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