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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 마음 맑음 Aug 30. 2023

내 가족에게도 생길 수 있는 일이다

나의 귀차니즘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그러려니 넘어가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었다. 때로는 외면과 도피가 문제해결에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 신고 후 경찰의 대응이라 할 것도 없었으니,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내가 생각을 바꾼 이유는 이 스토커가 상습범이라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고, 포기하려던 그 순간 초등학생 여자 아이가 혼자서 해맑게 총총거리며 우리 집 앞 골목길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초, 중, 고 여자 아이들이 혼자서 다니는 것을 많이 보았고, 늦은 저녁에 20대 여성들이 혼자서 귀가하는 것도 자주 보았기 때문에, 이 아이들이 내 딸이고 내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당한 것을 이 아이들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래도 나이 좀 더 먹은 내가 뭔가 해야 하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 날 그 스토커 앞에 내가 있었을 뿐이지, 가 아 다른 여성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아직도 어딘가서 다른 피해자들을 만들고 있을수도.  


내가 키 170cm에, 착하게 생긴 인상도 아니고, 필요하면 말도 아주 강하게 하는 사람이고, 초등학생 때부터 평생 운동을 쉰 적이 없을 정도로 나름 안 해본 운동이 없고, 헬스도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트레이너들에게 존경받는) 트레이너한테 정식으로 4년 배우고, 그 후로도 거의 매일 10년째 헬스를 하고 있어서 웬만하면 힘으로도 지지 않을 것 같은 이상한 자신감이 있는데, 나같이 불도저 같은 사람도 고작 15분 거리의 헬스장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집 앞에서 스토킹을 당할 정도면, '10대 20대 여자들은 얼마나 더 이런 사고에 노출되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내가 스토킹 당한 시간이 토요일 오후 1시, 가평 관광지에서 가장 차가 많고 가장 사람이 많은 무려 주말 점심시간이었단 말이다.


나야 뭐 이상한 근자감으로 힘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고, 당장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보이면 법적으로 문제 되는 수위라고 판단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일단 경찰한테 신고부터 하는 당돌함이 있고, 경찰한테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며 순찰도 신청하고, 날 지켜줄 남편도 있고, 걸어 다니는 게 싫으면 차로 다니면 되고, 나야 워낙 성향도 강하고 하려면 여러 방법으로 나를 지킬 수 있지만, 혼자서 다니는 10대 여자아이들과 저녁 늦은 시간에 혼자 다니는 20대 여성들이 계속 눈에 밟혔다.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했더니 일단 수사가 진행되려면 CCTV를 확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토킹 당한 지점이 집 앞 편의점이었고, 바로 건너편에 주유소가 있었기 때문에 두 곳의 CCTV를 확보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혼자 가서 CCTV 보여달라고 하면 당연히 안 될 거라, 다시 경찰서에 전화해서 CCTV 확보를 위해 같이 가주실 수 있냐고 도움을 요청했다. 사건 다음 날, 경찰 동행하에 스토킹 당일 CCTV 영상 확인을 의뢰했다.


경찰은 편의점 여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했고, 나는 당시 스토킹 당한 시기라고 예측되는 시간과 날짜를 말하고, 내가 쓰고 있던 민트색 우산과 내 옷차림을 설명했다. 하지만 내 영상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CCTV 각도가 편의점 앞 주차장만을 향하고 있어서 내가 지나치는 것까지는 안 보이는 걸까?' 내가 말한 시간대 5분 전, 후로 빠른 화면으로 살펴보았는데 민트색 우산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내가 예측했던 피해 시간에 오류가 있어 당시 화면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고, 10분만 더 앞으로 CCTV를 확인하면 스토킹 장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옆에서 기다리던 경찰이 헛기침을 하며 가봐야 한다는 신호를 보내왔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혹시 나중에라도 보이면 연락 좀 줄 수 있냐며 연락처를 건넸다. 사실은 스토킹을 당했다고 설명하니, 여직원은 내가 그런 피해를 당했을 것이라고 이미 예측하고 있었고, 자신도 편의점에서 스토킹을 당했었다고 말했다. 원래는 사촌동생이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그 동생이 스토킹을 몇 달 동안 지속적으로 수차례 당했고, 최근 여기서 일 하게 된 자신 또한 당했다는 것이다. 서로 피의자의 인상착의를 확인해 보니 동일 스토커인 것 같았다. 설명하는 것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제야 경찰도 사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여직원에게 물었다. 여직원은 아래와 같이 진술했다.


'2023년 2월과 3월 거의 매일,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동일 피의자가 편의점에 찾아왔다. 특히 사촌동생이 거의 매일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스토킹 피해를 당했는데, 주로 찾아와서 “같이 밥 먹자, 한 번만 만나주라. 이름이 뭐냐. 전화번호를 달라”라는 식으로, 여직원들이 강력하게 거부 표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을 걸고 따라다니고 기다리는 식으로 스토킹을 했다. 피해자가 “남자친구가 있다”라고 말했음에도 스토킹 행위가 지속되자, 피의자가 계산할 때 아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완벽하게 피의자를 무시할 정도로 강력하게 싫다는 표현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피의자의 스토킹 행위는 두 달 동안 거의 매일 지속되었다. 또한 야간 근무 중, 밤에 피의자가 20분 이상 밖에서 기다리길래 택시를 잡는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여직원이 퇴근하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계속해서 편의점 여직원을 스토킹 하며 정신적으로 괴롭힘을 가했다.'


편의점 직원의 피해 사실은 명백한 스토킹 범죄에 해당되었다. 경찰은 스토커가 편의점에 왔다면 얼굴이나 몸 전체가 나온 CCTV 영상이나 영수증 같은 것을 확보할 수 있냐고 물었고, 여직원은 한 동안 매일 오다가 요즘은 안 온다고 말했다. 또한 편의점 CCTV는 용량이 많아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해서 한 달 분량만 저장을 하기 때문에 그 전 영상은 모두 폐기되었다고 설명했다.


나 혼자 스토킹을 당한 것이 아니라, 나보다 훨씬 강도도 심하게 기간도 오래 당한 피해자가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는 단순히 스토커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스토커 범죄에 해당되는 내용임을 확인하게 된 상황이었다. 경찰은 이번에도 "남자가 나타나면 번호로 전화 주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편의점을 나섰고, 나도 따라 나갔다.  반대편 주유소 CCTV 확인도 동행해 줄 수 있을지 요청했으나 경찰은 "어차피 편의점 CCTV에서도 나왔으니 주유소 CCTV에서도 나왔을 것"이라며 거절하고 떠났다.


나는 다시 편의점에 들어가 더 자세히 대화를 해보았고, 여직원에게 피의자 신고 및 진술에 협조할 의사가 있음을 확인하고 서로의 이름과 연락처를 교환했다. 편의점 직원들의 진술을 받아 피의자에게 마땅한 스토킹 범죄 처벌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경찰의 이번 대응도 실망스러웠지만, 나뿐만이 아니라 더 심각한 여러 피해 정황이 드러난 이상, 이제부터 경찰의 도움 없이 스스로 동네 CCTV를 확보해야겠다는 각오를 했다. 어쩌면 우리 말고, 더 많은 피해 사실이 주변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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