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나에게 찾아온 증상은 자책이었다. 바보 같이 집으로 들어올 것이 아니라 편의점으로 피해서 경찰에 신고하거나 큰 길가로 나가서 대처를 했어야 했는데 왜 스토커한테 내 집을 알려줬지? 피의자 인상착의가 정확하지 않으면 찾기도 어렵고 수사를 할 수도 없다는데 내가 왜 빠르게 핸드폰을 들어서 사진이나 영상을 찍을 생각도 못했지? 내가 경찰에 다른 방식으로 진술하고 신고했으면 피의자를 수색하고 사건 수사를 해줬으려나? 내가 왜 레깅스를 입고 다녀서 이런 일을 만들었지? 나의 안 좋은 대응으로 인해 피의자에게 우리 집이 노출되고, 나와 내 아이 그리고 우리 가족을 위험에 빠트린 것 같은 죄책감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다.
첫째,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집으로 향하지 않고 가까운 편의점이나 가게나 경찰서로 들어가서 신고를 하는 것이 좋은 것은 맞다.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내 아이에게도 그렇게 가르칠 것이다. 하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나는 당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둘째, 만약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 최대한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으로 사진이나 영상을 찍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겪어본 결과 긴급한 상황에서 사람이 당황하면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무언가를 대응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셋째, 내 레깅스는 잘못이 없다. 저렴한 레깅스 대신 비싼 운동복을 대신 누가 사줄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다 떠나서 일단 레깅스가 편하다. 내 처신이 잘못한 것도 아니고, 내가 무엇을 입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무엇을 입었든 스토킹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가 잘못한 것이고, 피해자가 신고를 해서 피의자의 처벌을 바라는 이상, 경찰이 이 사건에 대한 수사를 해서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절차이다.
과거 성범죄를 당한 한 여성에게 여자가 처신을 잘못해서 혹은 옷을 야하게 입고 다녀서 그런 일이 생긴 거라며 여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여론이 형성된 사건을 기억한다.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는 스토킹 사건이 생겨도 주변과 가족 하물며 경찰도 '네가 예뻐서 그래, 네가 좋아서 그랬다잖아, 너랑 친해지고 싶다잖아' 식으로 가볍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20대 여성이 비키니 차림으로 1인 시위를 하며 '발가벗고 있어도 성폭행을 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뉘앙스의 피켓을 들고 있는 기사를 오래전 본 기억이 있다. 이 여성이 하고 싶었던 말은 여자들이 어떤 옷을 입든, 아무리 옷을 야하게 입었다 한들, 그것이 성폭행을 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닐뿐더러, 절대로 그 어떤 성범죄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야하게 입었다고 해서 피해자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가 명백한 잘못을 한 것이고, 피해자는 말 그대로 피해를 당한 피해자인 것이다.
(물론 사회적으로 적절한 옷차림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사회적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옷을 어떻게 입는지는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에 이 주제는 여기서 다룰 내용은 아니다. 심지어 나는 레깅스 위에 반바지를 입었고 거의 무릎까지 오는 펑퍼짐한 티셔츠를 입었기 때문에 야한 옷도 아니었다.)
프로파일러이자 범죄 심리학자인 이수정 교수에 의하면 미국이나 서양권 나라에서는 스토킹이 아주 중대 범죄로 다뤄지고 있다고 한다. 단순한 구애 행위가 아니라, 스토킹으로 시작해서 성범죄나 살인과 같은 강력 범죄로 이어지는 사례는 수많은 세월에 거쳐 수도 없이 반복되고 검증된 범죄이기 때문에, 초기에 스토킹을 제지하면 강력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수정 교수를 비롯한 여러 범죄심리학자들과 관련 정책가들이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알고 있고, 그로 인해 최근에서야 한국에서도 스토킹 처벌법이 통과되어 스토킹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라는 인식이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수정 교수가 말하기를 살인 사건을 보면 스토킹에서 살인까지 이어진 사건이 2018년만 해도 최소 30% 였고, 2017~2020년도 통계에 의하면 약 40%라고 한다. 약 40% 살인사건이, 강력 범죄가 이루어지기 전에 명확하게 쫓아다니면서 괴롭히는 스토킹 행위가 있었다는 것이다. 스토킹은 단순 괴롭힘이 아닌 성범죄나 살인을 알리는 일종의 시그널 혹은 강력범죄의 전조 증상이라는 말은 범죄 심리학자들이 지어낸 말이 아니고 통계가 검증하고 있다. 강력 범죄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스토킹 자체로도 심각한 범죄행위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강화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나에게 찾아온 증상은 의심이었다. 가족에게도 말했고, 주변에 친한 지인들에게도 말했는데 걱정을 해주긴 했지만 크게 문제가 아니라는 듯한 반응이었고, 앞으로 조심하라는 식의 반응이었다. 이렇게 분하고, 억울하고, 무섭고, 불안하고, 두려운데, 나만 이런 건가? 내가 이상한 건가?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나만 유난을 떨며 예민하게 구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들 때쯤, 인터넷에 스토킹 피해 관련 사례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유명 유튜버로도 활동하고 있는 정신과 의사의 스토킹 사례를 알게 되었다. 늦은 밤 의사가 자신의 개인 병원에서 혼자 남아 안 쪽 사무실 불 하나 켜놓고 있었는데, 띠띠띠띠, 갑자기 잠겨있던 출입문의 비밀번호가 눌러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누군가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이 늦은 밤에 누구지?' 하며 나가보니 처음 보는 여성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병원으로 들어온 것이다. 의사가 놀라면서 여자를 쫓아내고 안 쪽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CCTV 영상이 섬뜩했다. 몇 개의 CCTV 영상을 이어서 보여줬는데 여성은 그 후로도 병원에 들어와 프런트에 '만나고 싶다, 보고 싶다'등의 메모를 남기고 갔고, 비밀번호를 바꾸니, 외부에서 기다리면서 의사가 지나갈 때 좋아한다며 같이 식사하고 싶다는 식의 말을 했다고 한다.
이런 경우 피의자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자기 상상 속에서 스토킹 가해자는 피해자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망상을 갖고 있을 때가 많다고 한다. 이런 망상적인 생각을 지속하면서 편집증적인 행동 양상까지 이어지는데, 실제로 서로 연인관계로 착각을 한다거나 만남을 위한 약속을 했다는 식의 망상적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질환자성 스토커의 경우, 자신의 일방적인 구애가 아니라 피해자와 서로 친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관계가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자신이 거부되었다고 생각하면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해 돌발행동을 할 수 있고 강력범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는 것이다.
남자이고, 심지어 정신과 의사인데도 이 스토킹 사건으로 우울증과 불안증을 1년 이상 겪었으며 정신과 약을 먹었다고 한다. 남자이고, 심지어 정신과 의사이기 때문에 선뜻 주변에 도움을 청하거나 전문가에게 상담을 청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 의사도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지?' 라며 스스로에게서 원인을 찾으며, 원망을 했다가 자책도 했다가 심리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시기를 겪었다고 한다. 의사가 말하기를, 스토킹을 겪은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자책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먼저 인지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다음 영상에서 정신과 의사가 세 명의 유능한 변호사들과 한 자리에 모여 이 사건에 대해 썰을 풀어가는데, 이 때는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법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상태였고, 완벽하게 치유된 것은 아니지만 심리적으로도 많이 안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스토킹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찍은 이 영상에서는 결론적으로 세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공론화하라.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혼자서 전전긍긍하지 말고, 주변에 공론화해서 도움을 받고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찰에 신고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고, 주변에 알려야만 혹시 모를 추가 유사 피해로부터 미리 예방할 수 있으며, 변호사나 전문 상담가 등 피해 사건 관련 전문가를 통해 정식으로 도움 받을 필요가 있다. 이 의사도 첫 1년 동안 혼자서 우울증을 앓다가 오히려 공론화한 후 응원도 많이 받고, 주변의 도움도 많이 받으면서, 정신적으로 이 사건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고 한다.
둘째, 정신과 상담이나 약물 처방을 받아라. 별일 아니고,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알게 모르게 분명히 영향이 있으니, 조금이나마 일상에 안 좋은 쪽으로 변화가 생겼거나, 수면 문제가 생겼거나, 정신적 심리적 불안이 생겼다면 정신과 상담을 받고 필요하면 불안을 줄여줄 수 있는 약처방을 받으라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인 자신도 다른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고 약처방을 받았다고 하니, 하물며 일반인들이 겪는 트라우마는 더 큰 것이 당연한 것이다.
셋째, 이 의사는 변호사의 조언을 받아들여 병원 관리인처럼 수행원을 한 명 고용했다고 하는데, 이 정도는 못하더라도 호신용품을 소지하고, 위기사항 시 대처 방법에 미리 관심을 갖고 알아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수정 교수는 스토킹 행위나 범죄가 있을 시 반드시 신고를 해야 강력범죄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1366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나 02-2263-6464 <한국여성의 전화> 전화를 하면 법률적 도움, 전문 상담, 스토킹 피해 후 대응 방법이나 절차를 알려주는 등의 다양한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물리적 피해나 신체적 상해를 입지 않은 경우 경찰에서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더라도, 여성단체에 전화해서 도움을 청할 수 있다.
이렇게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고 나니, 내가 스토킹을 당한 것은 내 잘못이 아니고, 스토킹 행위는 문제가 아닌 게 아니라 분명히 문제가 되는 일이며,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피해를 위해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본격적으로 사건에 대응하기 위한 준비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